
인공지능(AI)발 전력 수요 폭증과 탄소중립이라는 거대한 파고가 맞물리며 ‘전기국가 패권전쟁’의 막이 올랐다. 과거에는 화석연료를 수입해 전기를 만드는 수준에 머물렀다면, 이제 전기는 국가 산업 경쟁력을 결정짓는 핵심 자원이자 안보가 됐다.
단순히 무탄소 전기를 많이 소비하는 국가로는 승산이 없다. 전력 생태계 전반에서 기술 주권을 쥔 ‘생산자형 전기국가’로 도약해야 한다. 배터리·태양광 등 전기화 기술 제조 역량은 물론, 항공이나 산업 공정 등 전기화의 사각지대를 메울 수 있는 수소·소형모듈원전(SMR) 기술까지 선점해야 산업 패권을 거머쥘 수 있다.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사진)는 “에너지 전환의 종착지인 ‘전기국가’가 차세대 패권의 핵심”이라며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첫 단추는 전력산업의 근본적 체질을 바꾸는 구조개편”이라고 강조했다. 에너지·자원의 역사가 문명 발전사와 궤를 같이한다는 통찰을 바탕으로 국가 발전론을 연구해 온 김 교수를 한국경제신문 본사에서 만났다.
▶교수님께서 평소 생각하신 국가 발전의 관점에서 전기국가를 설명해주세요.
“전기국가는 생소한 개념이 아닙니다. 인류는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처음 경제 성장이 시작됐고 국가 발전이라는 개념이 생겼습니다. 1차 산업혁명이 바로 영국이 석탄을 때서 그 동력으로 기계를 돌리고 배를 운항한 석탄국가 시대(팍스 브리타니카)죠. 2차 산업혁명에서는 미국 주도로 석유를 동력으로 내연기관 중심의 발전을 이룬 석유국가 시대(팍스 아메리카나)가 됐습니다. 3차 산업혁명이 인터넷의 시작이었다면, 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AI)과 에너지가 완전히 결합해 실질적인 성과를 내는 진정한 ‘전기국가’의 시대입니다. 즉 AI 구동을 위해 막대한 에너지를 확보하는 동시에 AI를 활용해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하는 ‘에너지와 AI의 상호 결합’이 이 시대의 핵심이라 할 수 있죠. 결국 석탄국가와 석유국가를 거쳐 전기국가로 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문명의 흐름입니다.”

▶전기국가가 되기 위해 패권 다툼을 벌이고 있다고 봐도 될까요?
“다만 아직은 완벽한 전기국가로 가기 전 단계라서 석유국가와 전기국가가 함께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 같은 패권국가는 생산자형 석유국가와 소비자형 전기국가입니다. 미국에 도전하는 중국 같은 나라는 소비자형 석유국가이자 생산자형 전기국가를 지향합니다. 현재 이 두 모델이 맞물리면서 세계 패권을 다투고 있는 거죠.”
▶중국은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 국가 주도로 전기국가가 됐습니다.
“중국이 생산자형 전기국가로 성공한 이유는 ‘중국 제조 2025’라는 국가적인 계획을 통해 세계 제조업을 석권했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주도해서 새로운 비교우위 산업을 창출한 것이죠.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세계화와 개방화를 외치고 신자유주의에 물들어서 국가 주도로 새로운 비교우위 산업을 창출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지난 30여 년간 일곱 개의 정부를 거치며 매 대통령 임기마다 경제성장률이 예외없이 평균 1%씩 하락했습니다. 2000년대를 전후해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학자들은 탈제조업과 탈석유를 외치며 서비스업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정작 우리는 미국처럼 벤처캐피털이나 실리콘밸리 같은 환경을 갖추지 못해 플랫폼이나 AI 산업에서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지도 못했죠.”
▶최근 중동 사태로 석유가스 가격이 폭등하자 정부가 재생에너지 전환과 전기국가를 더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전기국가로 성공하려면 전기라는 상품을 더 싸게 만들어 비교우위를 가져야 합니다. 신재생에너지로 가야 한다는 원칙에는 아무도 이견이 없습니다. 인류가 나가야 할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태양광이나 풍력에서 우리는 비교열위 상태에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 태양광 발전 시간은 평균 3.5시간인데 중국 고비 사막이나 미국 네바다는 그 2배인 7~8시간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땅도 없고 단위면적당 발전량도 부족합니다. 단순히 전기 생산 원가가 높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원가가 되어 국제 경쟁력을 좌우하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비교우위가 있는 에너지원을 함께 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전기국가 시대의 에너지 안보는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요?
“우리가 비교열위에 있는 재생에너지를 살리기위해서는 비교우위를 점할 수 있는 원자력, 특히 SMR(소형모듈원자로)를 동반시켜 균형을 맞추어야 합니다. SMR은 원자력이지만 개념이 다른 신기술입니다. 미국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 이미 행정명령으로 SMR을 ‘신에너지(클린에너지스탠다드)’ 범주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SMR이 완전히 개발되어 경제성을 갖추기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그 간극을 러시아산 천연가스로 메워야 합니다. 러시아는 영토 분쟁과 인구 규모 등으로 인해 중국과 일본을 경계하지만, 한국과는 상호 보완적 경제 구조를 가진 최적의 파트너가 될 수 있습니다. 러시아 입장에서 한국은 안보 위협도 없기에 한국과의 협력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후 경제 회복이 시급한 러시아는 한국을 자국의 값싼 천연가스를 공급받을 적임자로 낙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러시아 천연가스 수입을 늘리려 하면, 유럽처럼 미국의 제재를 받진 않을까요?
“미국의 패권 전략은 ‘1+3 전략’입니다. 1군과 3군 국가가 힘을 합쳐 2군 국가를 협공하는 필승 전략입니다. 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이 도전하자 적국이었던 독일과 일본을 부흥시켜 협공에 성공했습니다. 80년대 일본이 경제적으로 도전하자 플라자 합의로 일본을 누르고 한국과 대만의 가전·자동차 산업을 살렸습니다. 현재 미국은 2군 국가인 중국을 협공하려 합니다. 3군 국가인 우리 입장에서 보면 중국이라는 2군 국가를 견제하는 미국과 동지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를 뒤쫓는 개도국들(4군)에 원자재를 파는 러시아(5군) 역시 우리와 동지가 될 수 있습니다. 제 저서 '선착의 효'에서는 우리나라 같은 강소국의 전략을 ‘1+3+5 전략’으로 소개했는데, 이것이 미국의 1+3 전략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립니다. 미국은 중국을 꺾기 위해 석유가 가장 효과적인 도구임을 알고 있습니다. 중동이나 베네수엘라 석유는 미국이 통제할 수 있지만,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가는 육로 노선은 미국이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장기적으로 중국의 도전을 꺾기 위해서 푸틴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과 러시아 관계 개선은 미국의 양해를 얻어낼 수 있는 영역입니다. 일본도 러우 전쟁 중에 미국으로부터 러시아 북해 가스전 투자를 철수하라는 압박을 받았지만, 철수하면 중국이 다 가져간다는 논리로 설득했습니다.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생산자형 전기국가가 되기 위한 정부의 전략적 역할과 민간에 줄 시그널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비효율적인 현재의 전력산업 구조를 통폐합해야 합니다. 과거 한국전력의 발전 부문을 5개 화력발전사와 한국수력원자력으로 쪼갠 것은, ‘경쟁의 효율’이라는 경제 원론 수준의 지식으로 자연독점 산업에서 시장의 실패를 초래한 개악이었습니다. 발전 원가의 95%는 연료비입니다. 과거 한전이 단일 구매자일 때는 전 세계 판매자들이 우리에게 연료를 팔기 위해 가격 경쟁을 벌이는 ‘구매자 우위 시장’이었죠. 그러나 화력 발전사를 5개로 쪼개자 우리끼리 해외에서 연료 확보 경쟁을 벌이게 되면서 판매자가 가격 주도권을 쥐는 ‘판매자 우위 시장’으로 역전되었습니다. 결국 국가 전체적으로는 협상력을 잃고 더 비싼 비용을 지불하게 된 셈입니다. 연초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발전 자회사를 무슨 기준으로 5개로 나누었느냐’는 대통령의 지적이 있었습니다. 실무진이 ‘당시에는 연료 도입 경쟁을 위해서 5개로 나누었다’고 답변했는데, 이는 발전산업 현실과 동떨어진 현문우답(賢問愚答)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발전산업을 민영화하고 경쟁을 도입하기 위해서 나누었지만, 미 캘리포니아 정전 사태로 민영화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해서 어정쩡한 상태로 멈추었다’는 장관의 답변이 솔직한 것이었죠. 이제라도 전기국가 시대의 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해 전력산업 구조개편을 서둘러야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구조조정 방향은 석탄과 가스, 신재생끼리 발전원별, 기술별로 통폐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해외에서 연료를 싸게 사고 기술을 집중 개발해 비교우위를 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전체적으로 ‘원켑코(One KEPCO)’로 묶어야 합니다.”
▶쪼개놓은 공기업들을 통폐합하는 게 비효율적이라는 비판도 있을텐데요.
“발전 설비는 가동 시간과 비용 특성에 따라 기저·중간·첨두부하로 나뉘며, 이를 중앙 계획(Central Planning)에 맞춰 적절히 배치해야 국가적 효율이 극대화됩니다. 기저부하는 설비비가 높고 연료비가 낮아 늘 돌려야 하는 반면, 첨두부하는 설비비는 싸지만 연료비가 비싸 짧은 시간만 가동하는 게 경제적이기 때문입니다. 전력 수요가 폭증하는 '전기국가' 이행기에는 발전산업을 민간에 맡길 경우 시장 상황에 휩쓸려 특정 발전원만 비대해지고 전체 에너지 부하대의 균형이 깨질 수 있습니다. 특히 데이터센터 등 AI 산업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지금, 왜곡된 발전산업 구조를 이대로 방치하는 것은 국가적 자원 낭비를 초래합니다. 경쟁과 민영화는 전력 설비가 이미 부하대별로 완성되어 수요가 정체되거나 줄어드는 시기에 도입해야 비로소 효율을 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전력 수요가 팽창하는 현재는 전력산업 구조개편과 중앙 계획을 통해 발전원을 최적으로 배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석탄 발전 등을 따로 묶을 경우, 좌초자산을 떠맡게 될 자회사나 지역사회의 반발이 크지 않을까요?
“회사가 바뀐다고 발전소 위치나 환경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은 5개 사가 수익성을 지키기 위해, 원가가 싼 석탄 발전의 가동률을 최대한 높이고 가능한 늦게 퇴출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이를 하나로 묶어 놓으면 국가적으로 가장 비효율적인 발전소부터 체계적으로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또한 석탄 발전을 SMR로 대체하면 클린 에너지로의 변신도 가능합니다. 발전산업이 연료별로 재편되면 이런 첨단 기술 전환에 집중 투자해 좌초자산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고, 지역사회에도 매연이 줄어드니 훨씬 이득이겠죠.”
▶이미 발전시장에 들어온 사기업들도 있고, 원전 수출에서 민간의 역할도 분명한데요, 이들과 충돌하지는 않을까요?
“국가가 발전사업을 경쟁체제로 만든다고 유도해서 LNG발전 시장에 들어온 SK, GS, 포스코, 한화나 석탄발전 시장에 들어온 강릉에코파워 등이 있죠. 이들이 투자한 지분에 대해 결손을 보지 않도록 사유재산권은 당연히 인정해줘야 합니다. 또 재생에너지 분야는 이미 민간이 90% 이상이고 앞으로도 민간 주도로 갈테구요. 다만 원전 수출에서 두산이나 현대 같은 설비 제작사와 발전 운영사는 업종이 다릅니다. 발전 운영은 공기업이, 설비는 민간 기업이 맡아 협력해서 컨소시엄으로 진출하면 되는 겁니다.”
▶전력산업에서 민영화와 경쟁의 효율은 어려운 이야기일까요?
“사실 경쟁의 효율은 소비자가 상품을 선택할 수 있을 때 발생하는데, 전기는 눈에 보이지 않아 소비자가 생산처를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경쟁 체제 도입은 발전이 아니라 배전 단계부터 시작돼야 합니다. 소비자가 체감할 수 있는 서비스 품질이나 안정성을 바탕으로 배전부터 경쟁을 도입하고, 발전 부문의 경쟁은 가장 마지막에 검토해야 합니다. 전력 수요가 완전히 포화 상태에 이르러 전기국가가 완성된 시점이라면 민영화와 경쟁이 가능하지만, 수요가 늘어나는 과정에서 이를 무리하게 추진하면 캘리포니아의 블랙아웃 같은 대재앙이 초래될 수 있습니다. 과거 분리 경쟁을 주장했던 이들이 실책을 인정하지 않으려다 보니 전력산업이 어정쩡한 상태에 머물게 됐고, 이것이 전기국가로의 이행에 큰 지장을 주고 있습니다. 배전이나 소매 단계에서는 소비자가 직접 업체를 대하기 때문에 수리 대응이나 전력 품질을 기준으로 선호하는 회사를 선택하는 실질적인 경쟁이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배전이 아닌 발전부터 경쟁을 시키기 시작했는데, 이는 전력산업의 특성을 무시한 대단히 잘못된 결정이었던 거죠. 이제 전기국가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하루빨리 바로 잡아야 합니다.”
▶전기국가 시대이지만, 모든 것을 전기화하는 것은 어렵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전기화의 빈틈을 메울 핵심 기술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플라스틱 같은 석유화학 원료는 당장 전기로 대체할 수 없기 때문에 석유국가와 전기국가의 공존은 당분간 불가피합니다. 장기적으로는 신재생에너지로 가되, 우리의 지리적 비교열위를 극복하기 위해 SMR과 함께 ‘블루수소(화석연료를 개질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를 포집해 가두어 만든 수소)’에 주목해야 합니다. 재생에너지로 만드는 그린수소는 우리나라에서는 단가가 너무 높지만, 러시아 천연가스를 값싸게 들여와 블루수소를 만드는 것은 정유·화학 기술이 좋은 우리가 잘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탄소를 포집·저장하는 CCS 기술을 결합하면 국제적인 비교우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수소는 생산, 저장, 운반, 연료전지 활용까지 전 산업을 혁신하는 벨류체인을 형성합니다. 군사용 드론이나 잠수함 등 부가가치가 막대한 거죠.”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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