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바로 나예요. 나는 그냥 자연입니다.”발걸음을 옮기자 커다란 숲이 덮쳐왔다. 황무지에 심긴 작고 여린 치수(稚樹)가 해를 아흔한 번 넘긴 끝에 장대한 밀림을 이뤘다. 11일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에 펼쳐진 조각가 김윤신 회고전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을 마주한 단상이다.
국가대표급 사립미술관 호암이 허락한 ‘첫 생존 여성 작가’의 개인전, 아흔을 넘긴 ‘평생 현역’의 무대 같은 찬사가 전시장 입구에 서성인다. 그럴싸한 수식어지만 전시를 풀이하는 열쇠로는 적절치 않다. 톱질과 망치질 자국으로 가득한 김윤신의 예술세계를 성별이나 나이 같은 틀에 가두는 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의 감상법이 하나 있다면, 김윤신이 평생 남긴 1500점 중 엄선된 175점의 조각과 석판화 등 평면 작업이 품은 시간과 공간의 궤적을 따라가는 것. 전시를 기획한 태현선 미술관 수석큐레이터는 “20~21세기에 걸친 작가의 화력(畵歷)은 아시아 전통에서 출발해 유럽의 동시대 미술을 흡수하고 라틴아메리카 자연을 토대로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했다”고 했다.거의 모든 작품의 제목은 ‘합이합일 분이분일’이다. ‘저것(재료)과 내가 하나 되니 합(合), 그 속에서 새로운 게(작품) 탄생하니 분(分)’이라는 특유의 조형론이다. 흔한 에스키스 하나 그리지 않고 재료 앞에 홀로 서는 김윤신은 나무가 품은 목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미리 한 구상은 지나간 것”이라며 “지금 이 순간, 찰나에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단단한 나무조각들이 세워진 모노톤의 1층 전시장, 알록달록하게 채색된 ‘회화-조각’이 늘어선 2층 전시장까지 연대순으로 이뤄진 전시는 아니지만,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반복되는 ‘합과 분’의 생명력을 목격할 수 있다. 김윤신의 70여 년 화업의 결정적 순간으로 꼽히는 작품을 미리 살펴봤다.
전기톱을 든 시기부터 김윤신의 조각에선 급격한 조형 변화가 포착된다. 수평의 단을 위로 쌓은 듯 단조로웠던 이전 작품과 달리 역동성(‘합이합일 분이분일 1984-11’)이 더해졌다. 태 수석큐레이터는 “작품을 빙 돌면서 보면 심부가 허리뼈처럼 보인다”며 “나무에 마치 골격을 부여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 미국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이 소장 중인 ‘합이합일 분이분일 1987-88’. 처음 외부 전시 나들이를 나온 이 작품은 작가가 “가장 정든 작품”이라고 꼽기도 했다.
2층의 하이라이트는 마치 런웨이처럼 길게 이어지는 좌대 위에 자리잡은 채색된 나무조각들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덮치며 작가는 골방에 틀어박혀야 했다. 재료는 떨어졌고, 외출은 불가해 답답하던 차에 버려진 폐목재들이 눈에 들어왔다. 용도 폐기된 나무 파편을 모아 조각을 만들고, 이번엔 그 위에 색을 입혔다. 나무는 조각인 동시에 캔버스가 됐다. 이 새로운 형식을 작가는 ‘회화-조각’이라 이름 붙였다.동일한 모양의 작품이 전시장 바깥에 ‘노래하는 나무 2013-16V1’이라는 이름을 달고 서 있다. 나무조각을 알루미늄으로 캐스팅한 뒤 아크릴 채색을 더한 회화-조각이다. 햇빛을 받으며 호암미술관의 이름난 정원 희원을 바라보고 있다. 김윤신의 남은 큰 꿈조각 중 하나가 자연과 함께하는 야외조각전이란 점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다. 실내와 실외 사이에 위치한 이 작품은 관람객에게 그 꿈을 향하는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아닐까. 전시는 3월 17일부터 6월 28일까지.
용인=유승목 기자
※작가가 회고하는 어린 시절과 아르헨티나에서의 삶, ‘합이합일 분이분일’ 철학에 대한 보다 자세한 평론과 인터뷰는 오는 27일 발간되는 ‘아르떼 매거진 4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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