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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변 두 여성 난투극…"이긴 쪽 고르겠다"는 양다리男 정체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입력 2026-03-20 23:55   수정 2026-03-21 00:03


대낮의 길 한복판에서 두 여자가 마주쳤습니다.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 파블로 피카소(1881~1973)가 양다리를 걸친 여성들이었습니다. 한 명은 피카소와 먼저 만나 아이까지 낳은 여인. 다른 한 명은 피카소의 새 애인이었습니다.

“내 남자 곁에서 썩 꺼져!” “헛소리 하지 마!”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던 두 사람은, 결국 서로를 밀치고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피카소는 이 싸움을 말리기는커녕 낄낄 웃으며 말했습니다. “둘이 싸워서 이긴 사람한테 갈게.” 훗날 피카소는 이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하며 말했습니다. “내 인생 최고의 기억이었지.”

현대미술의 신(神)과 같은 존재, 천재 화가 피카소. 그의 삶은 이처럼 다른 여성들의 사랑과 눈물, 분노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단순한 가십거리로만 여길 수는 없습니다. 이런 연애사는 그의 작품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피카소는 연인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영감을 얻어 그림을 완전히 바꿨고, 변화무쌍한 화풍을 통해 위대한 작가가 됐습니다. 지난주 1편에서 이어지는, 그의 사랑과 그림 이야기.
발레리나 손을 잡고 상류 사회로
여자친구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피카소는 오래 슬퍼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1917년 발레단의 무대 장식과 의상 작업을 맡기 위해 이탈리아 로마로 건너간 그는, 두 번 사랑에 빠졌습니다. 한 번은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 등 르네상스 거장들의 원작 명화에 푹 빠진 것. 다른 하나는, 발레단의 발레리나였던 올가 코클로바와의 사랑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 명문가 출신인 올가는 피카소보다 열 살 연하의 우아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녀와 피카소는 서로 만나자마자 뜨거운 사랑에 빠졌습니다. 발레단을 바로 그만두고 이듬해 파리에서 결혼식을 올릴 정도였습니다. 두 사람은 정착해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피카소는 가정부와 운전사를 둘 정도로 풍족한 생활을 누렸습니다. 부인 덕분에 사교계 사람들과 만남도 갖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삐딱하고 도발적인 성향도 많이 누그러졌습니다.

이 시기 피카소의 그림은 또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기존 미술의 상식을 완전히 파괴한 입체주의를 발명해 놓고, 또다시 정반대의 고전적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겁니다. 피카소는 올가의 길고 우아한 팔다리를 우아하게 그렸습니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이탈리아에서 본 르네상스 거장 작품들의 영향. 둘째는 안정적인 상류층의 생활을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전통을 존중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이유는 올가의 부탁이었습니다. “입체주의로 그리면 나를 알아볼 수 없잖아요. 내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게 그려주세요.” 그래서 미술사가 요아힘 피사로는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이 시기 피카소를 신고전주의 시대라고 부르지만, 사실 ‘올가 시대’라고 불러야 한다.”



1921년 아들 파올로가 태어난 건 행복의 정점이었습니다. 피카소는 기뻐했습니다. 광대 복장을 입히는 등 여러 의상과 포즈로 아들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피카소의 본성이 또다시 고개를 들었습니다. 안정적인 가정, 풍족한 환경…. 다른 사람들이 꿈꾸는 생활이었지만 피카소는 이를 족쇄로 여겼습니다. 피카소는 이처럼 ‘잘 질리는’ 남자였습니다.

예술가로서는 이런 성향이 큰 장점이었습니다. 덕분에 피카소는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 혁신을 거듭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예술가 중에서 ‘이번에 작품이 멋지게 됐으니 내일은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술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작업을 마쳤다는 것은 이제 또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뜻일 뿐이다.” 하지만 배우자이자 가장으로서 이런 성향은 최악이었습니다.

피카소는 올가에게 완전히 질렸습니다. 이런 감정 변화는 그림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초기에 우아하고 아름답게 그려졌던 올가의 초상화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뒤틀리고 기괴하게 변해갔습니다. 그리고 피카소는 새로운 상대를 찾아냈습니다. 자신보다 28세 어린 마리 테레즈 발테르였습니다.
45세 피카소, 17세 소녀를 만나다
1927년 1월 파리의 라파예트 백화점 앞을 지나던 45세의 피카소는 17세의 아름다운 소녀를 발견합니다. 금발에 건장한 체격, 밝고 생기 넘치는 그녀. 아내와 아들이 있는 몸이었지만 피카소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피카소다. 우리 둘이 함께한다면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어.” 그렇게 마리 테레즈와 피카소의 관계는 시작됐습니다.

마리 테레즈는 올가와 모든 면에서 정반대였습니다. 올가는 격식과 예절을 중시하고, 남편인 피카소를 사교계에 소개하고, “내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게 그려달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여성이었습니다. 반면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가 하자는 대로 따르는 순종적인 소녀였고 미술에 대해서도 잘 몰랐습니다. 피카소에게 마리 테레즈는 올가와의 세계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도피처이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상이었습니다. 피카소는 올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마리 테레즈를 근처 아파트에 숨겨두고 약 8년간 두 집 살림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림은 또 달라졌습니다. 올가 시기의 절제된 고전주의는 흔적을 감추고, 대신 새로운 화풍이 나타났습니다. 부드러운 곡선, 관능적인 볼륨, 밝고 따뜻한 색채. 마리 테레즈의 금발과 젊음이 그림에 그대로 반영된 결과입니다.

이 시기의 대표작이 ‘꿈’(1932)입니다. 2013년 경매에서 약 2000억원에 거래된 이 작품에서는 잠든 여인의 얼굴이 두 면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한쪽은 평화로운 잠든 얼굴, 다른 쪽은 몽환적인 표정. 여러 시점을 한 화면에 담는 입체주의 기법은 여기서도 쓰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물은 입체주의 시기의 뾰족하게 해체된 그림과 전혀 다릅니다. 같은 원리로도 완전히 다른 작품을 만들어내는 거장다운 실력입니다.

하지만 이런 피카소의 이중생활은 1935년 마리 테레즈가 딸을 낳으면서 8년 만에 들통납니다. 피카소와 올가의 관계는 당연히 파탄났습니다. 둘은 별거하기로 했습니다. 다만 이혼은 하지 않았습니다. 재산을 나눠주기 싫었던 피카소, 피카소를 놓지 못했던 올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습니다.



안타깝게도 별거 후 올가는 피카소를 놓지 못했습니다. 편지를 보내고, 따라다니고, 여기저기 피카소 얘기를 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는 사이 올가의 건강은 계속 악화됐습니다. 아마도 스트레스 때문이었을 겁니다. 암에 걸린 올가는 1955년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을 때까지 그녀는 ‘법적인 피카소의 아내’로 살았습니다.
카페에서 손에 칼 꽂던 여자
그렇다면 피카소와 마리 테레즈는 백년해로했을까요. 그럴 리가 없겠죠. 여전히 마리 테레즈는 아름다웠고 순종적이었지만, 피카소는 또다시 그녀에게 질리고 말았습니다.

1936년 55세의 피카소는 파리의 한 카페에서 낯선 여자에 시선을 빼앗겼습니다. 여성은 장갑을 낀 채 테이블 위에 손을 편 뒤, 손가락 사이사이로 칼을 빠르게 찍는 아주 위험한 장난을 치고 있었습니다. 칼이 빗나가 손에서 피가 났지만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피카소는 그 모습에 매료됐습니다. “제가 그 장갑을 좀 가질 수 있을까요.” 그렇게 피카소와 그 여성, 도라 마르의 인연은 시작됐습니다. 피카소는 그 피 묻은 장갑을 평생 보관했다고 합니다.


도라 마르는 유고슬라비아(지금의 크로아티아)계 프랑스인 사진작가였습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었고, 나이는 피카소보다 스물일곱 살 어렸습니다. 도라는 지적이고 도발적인 성격의 소유자였고, 피카소와 대등하게 예술을 논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피카소의 여성 편력에는 패턴이 있습니다. 그는 한 유형의 여자에게 질리면 정반대 유형의 여자를 찾았습니다. 올가의 격식과 우아함에 질려 마리 테레즈의 순종과 관능을 찾았고, 또다시 질리자 도라의 지성과 도발에 끌렸던 겁니다.

도라의 지적 자존심은 피카소에게 자극이었고 정복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별거 중인 법적 아내 올가,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연인 마리 테레즈, 그리고 새 연인인 도라. 이 시기 피카소의 삶에는 세 여성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도라와 마리 테레즈가 파리 길거리에서 만나 싸운 것도 이때의 일입니다.


그리고 도라를 만난 피카소의 그림은 또다시 달라졌습니다. 마리 테레즈 시기의 부드러운 곡선 대신 그의 그림에는 날카롭고 각진 형태, 어둡고 격렬한 색채가 등장했습니다. 도라의 날카로운 성격이 화면에 반영된 것이지요. 동시에 이 시기 피카소의 조국 스페인에서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게르니카
1936년 시작된 스페인 내전. 스페인 사람들은 둘로 갈라져 서로를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주변국들도 내전에 개입하면서 전쟁은 더욱 격화됐습니다. 그리고 1937년 4월 26일. 나치 독일 공군이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했습니다. 무방비 상태의 민간인들이 사는 마을이었습니다. 약 1000명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피카소는 프랑스에서 신문을 통해 이 소식을 접했습니다. 흑백 보도사진에 찍힌 폐허와 시신들을 보고 피카소는 격분했습니다.


마침 피카소는 그해 열리는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관의 벽화를 의뢰받은 상태였습니다. 원래는 다른 주제를 구상하고 있었지만, 게르니카 폭격 소식을 듣자 즉시 주제를 바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그리고 6주 만에 가로 7.8미터, 세로 3.5미터의 대작을 완성합니다. 제목은 '게르니카'. 이 작업에서 도라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사진작가였던 그녀가 게르니카의 제작 과정을 단계별로 촬영해 기록으로 남긴 겁니다. 덕분에 우리는 피카소가 어떤 순서로, 어떤 고민을 거쳐 이 대작을 완성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진들은 도라가 피카소의 작업 파트너였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게르니카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색이 없다는 겁니다. 그림 전체가 흑백입니다. 피카소가 신문의 흑백 보도사진을 통해 폭격 소식을 접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참혹한 현실을 화려한 색으로 꾸미지 않고 날것 그대로 전달하겠다는 의도이기도 합니다.


화면 왼쪽에는 죽은 아이를 안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가운데에는 비명을 지르는 말이 있고, 바닥에는 찢긴 병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습니다. 오른쪽에서는 공포에 질린 사람이 불길 속에서 팔을 뻗고 있습니다. 흑백이지만 비명과 고통과 혼란의 순간이 생생하게 전해집니다.



피카소 특유의 입체주의가 이 그림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입체주의란 ‘여러 시점을 한 화면에 담는’ 기법. 게르니카에서 이 기법은 전쟁의 혼란과 공포를 표현하는 데 쓰였습니다. 정면과 측면이 동시에 보이는 얼굴들과 뒤틀린 몸들. 입체주의는 폭격의 순간 사방에서 굉음이 울리며 동시에 밀려오는 압도적인 상황을 한 화면에 담는 데 제격이었습니다. 단순한 형식 실험이었던 입체주의는 이 작품에 이르러 인간의 극단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강력한 도구가 됐습니다.

피카소의 이 그림이 없었다면 게르니카 폭격 사건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냉정하게 말해서 이보다 더 참혹하고 큰 규모의 학살은 인류 역사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피카소가 작품을 남긴 덕분에 이 사건은 역사적인 비극이 됐고, 이후 반전(反戰)의 상징이 됐습니다. 미술이 현실을 고발하고 세상을 바꾸는 매체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 작품인 것입니다. 그래서 게르니카는 피카소가 위대한 화가인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 꼽힙니다.

미술을 모르는 사람도 이 그림 앞에 서면 뭔가를 느낍니다. 설명이 없어도 이 그림이 끔찍한 무언가에 대한 분노와 슬픔을 담고 있다는 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게 게르니카의 힘입니다. 지금 이 작품은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 걸려 있습니다.
피카소가 울린 여자
게르니카를 완성한 뒤 피카소는 새로운 주제에 집중하게 됐습니다. ‘우는 여자’. 게르니카 왼쪽에는 죽은 아이를 안고 울부짖는 어머니가 있는데, 그 어머니의 얼굴을 독립된 작품으로 만든 것이었지요. 전쟁의 공포를 전체적으로 담은 게르니카와 달리 우는 여자 연작은 공포가 인간의 얼굴에 새겨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그린 우는 여자 연작은 확인된 것만 30점이 넘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의 모델은 도라였습니다. 도라는 게르니카 연작을 도운 파트너이자, 피카소와 대등하게 예술을 논할 수 있는 지적인 여성이었습니다. 자존심도 강했지요. 하지만 피카소는 그 자존심을 짓뭉개는 걸 즐겼습니다. 그렇게 도라를 울리고는 그 우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도라가 “이런 그림은 싫다”고 해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도라는 항상 우는 여자다.” 그래서 ‘우는 여자’의 눈물은 전쟁의 비극에 대한 분노와 슬픔의 눈물이기도 하지만, 피카소라는 남자 옆에서 부서져 가는 여성의 개인적인 눈물이기도 합니다. 사실 피카소에게는 그게 어떤 의미의 눈물이건 상관없었을 겁니다. 그에게 그림만큼 중요한 건 아무 것도 없었고, 연인인 도라 역시 한 인간이 아니라 그림의 소재에 불과했으니까요.

도라와의 관계는 9년 동안 지속됐습니다. 그 사이 그녀는 점점 무너져 갔습니다. 피카소와 헤어진 뒤 도라는 신경쇠약에 빠져 정신병원에 입원했습니다. 피카소는 도라에게 남프랑스에 있는 집을 한 채 사줬습니다. 일종의 ‘퇴직금’이었습니다. 퇴원 후 도라는 그곳에서 은둔 생활을 했습니다. 천주교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은 그녀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피카소 다음에는 신밖에 없다(After Picasso, there is only God).” 피카소를 끝내 잊지 못하던 그녀는 1997년 8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때까지 피카소가 만난 여인들은 하나같이 부서졌습니다. 하지만 단 한 명만은 예외였습니다. 그녀는 피카소를 버리고 떠나갔고, 그 후 더욱 행복해졌습니다. 피카소가 도라를 버리고 만난 여성, 프랑수아즈 질로. 그녀를 만난 피카소의 이야기는 마지막 편인 3편으로 이어집니다.

**이번 피카소 기사들은 A Life of Picasso (존 리처드슨 지음, 전 4권), Life with Picasso (프랑수아즈 질로, 칼턴 레이크 지음), Picasso: My Grandfather (마리나 피카소 지음), Loving Picasso: The Private Journal of Fernande Olivier (페르낭드 올리비에 지음), The Success and Failure of Picasso (존 버거 지음), Picasso and His Friends (페르낭드 올리비에 지음), Portrait of Picasso as a Young Man (노먼 메일러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문화재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국내 문화 분야 구독자 1위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미술 소식과 지금 열리는 전시에 대한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 구독 중인 8만명 독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세 권의 책으로 곁에 두실 수도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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