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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라이프이스트-김성훈의 지속 가능한 공간] 프리츠커상을 기다리며

입력 2026-03-19 16:13   수정 2026-03-19 16:14

열흘 전, 2026년 프리츠커 건축상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칠레의 건축가 스밀랸 라디치(Smiljan Radi?). 그의 작업은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지독히 소박하고, 절제되어 있으며, 어딘지 오래된 것처럼 보인다.



이 소식을 들으며, 나는 10년 전 파리의 기억이 떠올랐다.

2016년 3월이었다. 그날 나는 파리의 사무실 의자에 앉아, 요르단 프로젝트 건으로 현지 업체와 한창 통화 중이었다. 아랍어 억양의 영어가 수화기 너머로 이어지던 그 순간, 사무실 안에서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그 소리가 점점 묘하게 깔리는 것이었다. 사무실 특유의 집중된 공기가 흔들리고 있었다.

자하 하디드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기관지염 치료를 위해 미국 마이애미의 병원에 입원 중이던 그녀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향년 65세. 이라크 바그다드 출신의 영국 건축가. 중동의 감수성과 유럽의 지성이 결합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유체적(流體的) 건축 언어로 세계 건축계를 뒤흔들었던 사람. 한국에서도 그녀의 이름은 특별하다.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설계한 건축가로, 대중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중동계 여성 건축가라는 정체성 위에 쌓아 올린 그 압도적인 스타성은, 건축계를 넘어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었다.



내가 몸담고 있던 아키텍처 스튜디오(Architecture Studio)는 자하 하디드 사무소와 여러 차례 국제 공모전에서 맞붙은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느꼈던 그녀의 존재감은 단순히 '경쟁자'라는 말로는 담기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날 사무실을 감돌던 웅성거림은 단순한 놀라움이 아니었다. 하나의 시대가 끝나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바로 그해 프리츠커상이 칠레의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에게 돌아갔다. 사회참여 건축가. 저소득층 주거, 반완성 주택, 재난 이후의 도시 회복. 세상에서 가장 권위 있는 건축상이, 내가 알던 그 '스타 건축'의 문법과는 전혀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그 두 사건이 같은 해에 겹쳤다.

그리고 사실 그 무렵,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하나의 결심을 굳혀가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것. 파리에서 배우고 익힌 것들을 가지고, 이제는 내 건축을 시작하겠다는 것. 오랫동안 남의 언어로 건축을 해왔다면, 이제는 내 땅의 언어로, 내 방식으로 공간을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건축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화려하지 않아도 되는 건축. 오래 남는 건축. 사람과 장소와 생태가 함께 숨 쉬는 건축. 한 마디로, 지속가능한 건축이었다.

아라베나의 수상과 자하 하디드의 타계가 겹친 그 순간, 나는 그것이 하나의 시대적 신호라고 느꼈다. 건축이 더 이상 형태의 혁명과 명성의 무대만이 아닌, 그것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 사람과 장소와 시간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는 신호. 그렇다면 내 자리는 바로 여기가 아니라, 내 땅이어야 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그날의 나는, 알고 있었다.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것을. 사실 그 뒤로 1년 이상의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라디치의 건축은 그 흐름의 심화다.

그는 거대한 오피스도, 글로벌 브랜드도 없다. 파타고니아의 자연과 라틴아메리카의 고유한 풍토 안에서 돌을 쌓고 나무를 결합하며, 빛이 어떻게 공간을 시간 속으로 끌어들이는지를 탐구해왔다. 그의 건축은 처음 보면 어딘가 낯설고, 오래 보면 마치 그 자리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바로 '장소'를 만든다는 뜻이다.

프리츠커 위원회가 10년에 걸쳐 두 번이나 칠레 건축가를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선언이다. 세계화의 언어가 아닌 지역의 언어로, 스펙터클이 아닌 고요함으로, 명성이 아닌 진정성으로 건축하라는.

한국에서도 기대가 없지 않았다. 건축계 안팎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던 것도 사실이다. 아직이다. 그러나 나는 이 '아직'이 단순히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은 전 세계 문화의 중심에 서 있다. K팝, 영화, 드라마, 음식, 패션. 한류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현상이다. 건축 기술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의 건설 기술과 엔지니어링 역량은 세계 시장에서 확실히 인정받고 있다. 중동의 초고층 빌딩도, 동남아의 대형 인프라도 한국 기업의 손을 거친다.

그런데 왜 프리츠커상은 오지 않는가.

나는 그 질문 앞에서, 파리에서 겪었던 어느 저녁을 떠올린다. 아이들이 프랑스 학교에 다니던 시절, 학부모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낯선 동양인 아버지. 처음에는 분명히 느껴졌다. 시선의 온도가 조금 달랐다. 특별히 무례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딘가 거리를 두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런데 내가 건축가이고, 파리의 사무소에서 실무를 하고 있다고 말하는 순간, 그 눈빛이 바뀌었다. 단번에. 존중과 호기심이 담긴 눈으로. 질문이 이어졌고, 대화가 깊어졌다. 그것이 프랑스에서 건축가의 위상이었다. 직업이 아니라, 그 사람을 이해하는 하나의 문화적 좌표였다.

한국은 어떠한가.

물론 예전에 비하면 건축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건축가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나오고, 건축 기행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며, 젊은 세대 사이에서 '좋은 공간'에 대한 감수성도 높아졌다. 변화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건축가가 사회적 의사결정의 파트너로 대우받고 있는가, 라는 질문 앞에서는 아직 머뭇거리게 된다. 건축설계 대가 기준은 선진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채 오랫동안 제자리였고, 도시와 공간을 결정하는 중요한 테이블에서 건축가는 여전히 늦게 호출되는 경우가 많다. 젊은 건축가들은 치열한 아이디어로 공모전을 통과하지만, 그 정신이 완공까지 온전히 살아남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는 묻기가 조심스럽다.

프리츠커상은 건축가 한 사람이 받는 상이지만, 그것은 그 사회가 건축을 어떻게 대우해왔는가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 아라베나는 칠레 사회가 건축가를 사회 문제 해결의 파트너로 인식했기에 가능했다. 라디치는 자국의 풍토와 문화를 지키는 건축을 오랜 시간 묵묵히 지지한 사회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건축가를 길러내는 것은 건축학교가 아니다. 그들이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사회적 구조가 그들을 길러낸다.

나는 이 칼럼에서 늘 '즐거운 지속가능성'을 이야기해왔다. 오래 버티는 것, 그리고 그 버팀이 즐거워야 한다는 것. 한국으로 돌아와 내 이름으로 건축을 시작한 지 10년이 되어간다. 그 10년은, 2016년 파리의 그 웅성거리는 사무실에서 내가 마음속으로 품었던 질문의 연장선이었다. 지속가능한 건축이란 무엇인가. 지역의 재료를 쓰고, 그 땅의 기억을 읽고, 사람과 생태가 함께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일. 그리고 그런 건축이 가능하게 하려면, 그 건축가가 10년, 20년을 한 자리에서 꾸준히 고민할 수 있는 여건이 사회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도.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나는 오래 이 말을 믿어왔다. 라디치가 그 믿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한국의 프리츠커상은 반드시 온다. 한국 건축의 역량과 깊이는 이미 그 수준에 닿아 있다. 그러나 그날이 오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먼저 건축을 대하는 태도를 한 뼘 더 바꿔야 한다. 건축가를 시공의 대행자가 아닌, 삶의 질을 설계하는 파트너로 인식하는 문화. 속도보다 밀도를, 규모보다 깊이를 존중하는 사회, 그것이 먼저다.

프리츠커상은 건축가에게 묻는 상이 아니다. 그 사회에게 묻는 상이다. 우리는 어떤 건축가를 기다리고 있는가. 아니,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고 있는가.

<한경닷컴 The Lifeist> 김성훈 지음플러스 대표, 건국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 겸임교수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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