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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뚜껑에서 ‘무한’을 보다…엘 아나추이의 결정적 순간

입력 2026-03-20 09:51   수정 2026-03-20 09:53



자라온 환경과 처한 상황, 그리고 순간의 선택에 따라 삶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펼쳐진다. 아프리카 가나 출신의 엘 아나추이는 이를 작품으로 풀어내는 작가다. 그는 인간과 동물, 식물이 환경에 따라 변화하고 적응하듯, 예술 또한 그래야 한다고 여긴다. 예술이 곧 삶이라면, 예술 역시 변화하고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엘 아나추이는 일상의 재료로 작품으로 만들어왔다. 1970년대 초에는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로 만든 원형 쟁반에 가나 아칸(Akan) 부족의 '아딘크라(Adinkra)' 상형문자를 새겨 넣었고, 깨진 항아리나 우유통 뚜껑처럼 우리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재료를 활용했다. 이는 “조각가란 자신이 처한 환경이 제공하는 재료로 작업하는 사람”이라는 그의 신념에서 비롯됐다. 작가는 미술대학에서 조각을 공부하고, 나이지리아대학교에서 조소과 교수로 40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며 조각가로의 정체성을 형성해 왔다.


그가 병뚜껑에 천착하게 된 건 1990년대부터다. 어느 날 문득 마주친 자루에 가득 찬 버려진 병뚜껑에서 작가는 무한함을 봤다. 화이트큐브 서울과 홍콩, 두 곳에서 그의 병뚜껑 신작이 공개됐다. 이번 전시는 화이트큐브와 첫 호흡을 맞추는 자리로, 양면성을 띈 새로운 병뚜껑 작업을 선보인다. 지난 17일 엘 아나추이 스튜디오 디렉터 루이스 네리(Louise Neri)와 화이트 큐브의 큐레이터 이케나 말버트(Ikenna Malbert)가 화이트큐브 서울에서 그의 전시 ‘LuwVor’에 걸린 작품들을 소개했다.

그는 병뚜껑과 통조림 캔을 자르고, 접고, 압축하고, 펼치는 등 변형한 후 가느다란 구리선으로 연결한다. 병뚜껑의 색과 질감이 모두 달라 조합에 따라 수백 가지 이상의 응용이 가능하고, 작품의 크기 또한 무한히 확장할 수 있다. 대형 작업을 위해 작가는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작품을 만든다.



루이스 네리 디렉터는 작가의 작업 방식을 즉흥 연주에 비유할 수 있다고 표현했다. 작가는 작업자들에게 각자의 역할을 부여한 뒤, 그들의 방식을 신뢰한다. 어느 정도의 방향이나 가이드는 제시하지만, 개개인의 고유한 방법과 접근 방식을 작품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한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이 바이올린, 트럼펫, 첼로를 연주하듯 각기 다른 결과물을 내놓으면 작가는 이를 편집해 하나의 곡을 만들듯 편집해 작품을 완성한다.



작가의 작품은 조각과 설치, 회화의 경계를 넘나든다. 그는 전시 매뉴얼을 전달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전시장의 구조와 큐레이터의 기획력에 작품을 맡기는 것이다. 화이트큐브 서울에는 총 네 작품이 전시됐다. 작품 세 점은 벽에, 나머지 한 점은 천장에 매달려 360도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했다. 관람객들은 작품의 틈 사이로 보이는 갤러리 공간과 다른 사람들을 통해 작품의 또 다른 차원을 만들어낸다.

엘 아나추이의 작품은 앞면과 뒷면이 존재한다.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설치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 작가는 작품의 비고정적인 형태를 지향하며, 매번 새로운 구조를 제시하길 원한다. 평면의 작품이 입체 형태로 전시될 수도 있냐는 물음에 루이스 네리는 “명확히 물어보진 않았지만, 그렇게 설치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며 “작가는 유연한 접근을 적극적으로 허용하고 장려하는 편이기 때문에 전시 공간과 작품의 조건 등에 따라 상당한 변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시는 4월 18일까지.

강은영 기자 qboo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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