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과 이란 간 전쟁으로 촉발된 유가 급등이 장기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금과 구리를 포함한 주요 원자재 가격이 일제히 하락했다.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이번 에너지 충격이 결국 글로벌 경기 둔화나 침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계감이 확산되고 있다.
19일(현지시간) 금 가격은 약 6% 하락했고, 은은 8% 급락했다. 여기에 산업용 금속인 구리와 팔라듐도 각각 2%, 5.5% 떨어지며 원자재 전반으로 매도세가 확산됐다.
금과 은은 이란 전쟁 발발 이후 줄곧 하락세를 이어오고 있다. 안전자산으로 분류되는 금조차 약세를 보이는 것은 유가 급등이 인플레이션 재상승 우려를 자극하고, 이에 따라 금리가 더 오래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전망이 반영된 결과다. 이자를 지급하지 않는 금은 금리 상승기에 상대적으로 매력이 떨어진다.
여기에 달러 강세도 금 가격을 끌어내리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금리가 상승하면서 달러 가치가 강세를 보이고, 이는 금 가격 하락 압력으로 이어졌다.
피터 부크바르 원포인트 BFG 웰스파트너스 최고투자책임자(CIO)는 CNBC에 “인플레이션 리스크로 인해 시장이 기대했던 Fed의 금리 인하가 사라지고, 전 세계적으로 금리가 상승하며 실질금리까지 오르는 상황이 금 가격에 부담을 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날 미국 10년물 국채금리는 장중 4.3%를 넘어섰다.
이란전 초기에는 구리와 팔라듐 등 산업용 금속 가격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흐름을 보였지만, 최근 들어 하락세로 돌아섰다. 경기 둔화 우려가 본격적으로 가격에 반영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구리는 전자기기, 전력망, 건설 등 다양한 산업에 활용되는 대표적인 경기 민감 자산이다. 이 때문에 구리 가격 하락은 통상 경기 둔화 신호로 해석된다.
월가에서는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유가 상승이 소비자와 기업의 지출을 위축시키고, 결국 경기 침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시장에서는 이를 ‘수요 파괴’ 단계로 지칭하고 있다.
부크바르는 “산업용 금속 시장에서는 이제 투자자들이 경기 침체 리스크를 본격적으로 반영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현재 시장에서는 인플레이션은 높아지고 성장 기대는 낮아지는 ‘스태그플레이션’ 시나리오가 거론되고 있다. 실제로 금리 상승과 성장 전망 하향이 동시에 나타나는 이례적인 흐름이 감지되고 있다.
다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상황이 장기적인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제한적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에드 야데니 야데니리서치 대표는 “1970년대와 같은 지속적인 스태그플레이션이 재현될 가능성은 낮다”고 밝혔다. 그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에도 유가 급등과 인플레이션 상승이 있었지만 경기 침체로 이어지지는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제롬 파월 Fed 의장도 최근 기자회견에서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용어는 훨씬 더 심각한 상황에서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선을 그었다.
시장에서는 향후 원자재 가격 방향을 좌우할 핵심 변수로 전쟁의 지속 여부를 꼽고 있다. 부크바르는 산업용 금속 가격이 안정되기 위해서는 전쟁 종료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반면 금 가격은 중장기적으로 반등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각국의 재정 적자와 국가 부채 확대가 금 가격을 지지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전쟁에 따른 군사비 지출 확대는 재정 부담을 더욱 키울 가능성이 있다.
골드만삭스의 크리스티안 뮐러-글리스만 자산배분 리서치 책임자는 “스태그플레이션 충격이 지속되고 실질금리가 하락할 경우, 실물자산 및 통화 분산 수요 증가로 금 가격이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뉴욕=박신영 특파원 nyus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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