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무 담당 임원에게 '비품 관리' 등 잡무를 맡기고 이행하기 어려운 업무를 연달아 지시한 후 이를 빌미로 징계한 회사의 행태에 법원이 제동을 걸었다. 경험이 전혀 없는 업무에 대해 '망신 주기용' 브리핑 지시나 불명확한 매뉴얼 작성 요구는 정당한 업무지시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22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11부는 최근 주식회사 A가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제기한 부당정직구제재심판정취소 청구의 소에서 회사의 청구를 기각했다.
갈등은 법적 다툼으로 번졌다. B씨는 2023년 8월 대표이사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했고, 실제로 고용노동청은 대표에게 과태료 처분을 내렸다.
이후 회사의 압박은 더욱 거세졌다. 회사는 2024년 3월 B씨에게 회사 매뉴얼 작성, 네이버 홍보글 작성, 해외선물 유튜브 채널 검색, 카드뉴스 제작, 사칭 채널 신고 등의 업무를 새로 부여했다. 이에 B씨가 업무를 거부하거나 항의하자, 이어 3월 15일과 21일에는 업무지시 불이행과 무단결근, 무단지각 등 이유로 '감급 3개월'과 '감급 2개월'의 징계를 연달아 내렸다.
결정적인 사건은 회사는 법무 전문가인 B씨에게 "해외선물 시장분석 및 진입이 어려운 이유"를 직원들 앞에서 브리핑하라고 지시한 것이었다. 이에 B씨가 "전문 지식이 없어 수행이 어렵다"며 항의하고 브리핑 당일 점심 식사를 위해 자리를 비우자, 회사는 이를 '무단이탈'과 '업무지시 거부'로 규정해 '정직 15일'의 처분을 내렸다.
이에 B씨는 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냈고 중앙노동위원회가 이 정직 처분이 부당하다고 판정하자, 회사는 이에 불복해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것.
이어 "기존에 4년 이상 담당하던 법무 업무가 아님은 물론이고, 조직개편 및 바뀐 업무분장 변경에 따른 담당 업무에도 해당하지 않는다"며 "기존에 담당하던 업무와 전혀 다른 업무를 맡기려면 교육훈련을 실시하거나 적절한 수준의 업무를 단계적으로 부여함으로써 참가인에게 숙련의 기회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회사가 요구한 '회사 매뉴얼 작성' 업무 등의 지시가 불명확한 점도 회사에 불리한 정황이 됐다. 재판부 "어떤 매뉴얼이 필요한지 특정조차 하지 않고 막연히 업무를 지시했다"며 "(B씨가) 어떤 부분이 미흡한지 구체적으로 알려달라고 하였으나, 회사는 구체적으로 보완할 부분을 지적하지 않은 채 동일한 업무 지시를 반복했다"고 지적했다.
여러 가지 업무를 동시에 지시하면서 짧게는 1~2일, 길게는 4~5일의 기한을 설정한 것에 대해서도 "징계사유를 만들기 위해 이행 불가능한 기한을 설정하고 업무를 지시한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든다"며 "업무지시를 불이행한 것이 징계사유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이번 판결은 전문성을 가진 고위직 근로자를 하위 직급으로 강등시킨 뒤, 전공과 무관한 업무나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과업을 부여하고 이를 빌미로 징계하는 사실상의 해고 압박은 '인사권의 범위'를 벗어난 위법한 행위임을 분명히 했다는 평가다.
김상민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법원이 업무 필요성뿐만 아니라 지시의 '구체성'과 '수행 가능성'을 꼼꼼히 따졌다"며 "인사 명령 시 해당 업무가 근로자의 경력과 숙련도에 비추어 적절한지, 그리고 충분한 교육과 준비 기간을 제공했는지를 반드시 검토해야 한다는 취지"라고 조언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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