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복, 북, 판소리, 갓을 쓴 저승사자…. 어느 무대 위에서 펼쳐진 광경이다. 한국에서 열린 전통 공연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를 지켜보고 있는 관객들 대부분은 외국인, 그것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배우와 감독들이다. 에마 스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귀네스 팰트로, 스티븐 스필버그 등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공연을 즐기고 있다. 이들의 손엔 K팝 팬덤을 상징하는 아이템인 응원봉이 쥐어져 있다. 그리고 무대 위에 이재, 레이 아미, 오드리 누나가 나타나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헌터스’(이하 ‘케데헌’)의 OST인 ‘골든’을 부르기 시작한다. 24명의 무용수가 함께 올라 깃발을 휘날리며 거대한 금빛 물결을 완성했다. K컬처 역사에 길이 남을 최고 영예의 순간이지 않을까.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지난 3월 15일(현지 시간) 열린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K컬처 축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아카데미는 세계 최고 권위의 영화 시상식이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이 시상식에서 ‘케데헌’은 장편애니메이션상과 주제가상을 받아 2관왕을 차지했다. 골든글로브 어워즈, 그래미상에 이어 오스카까지 석권하여 사실상 글로벌 시장에서 받을 수 있는 영예의 트로피 대부분을 거머쥐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번 시상식에서 선보인 ‘골든’ 공연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케데헌’의 뿌리인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동시에 잘 만든 콘텐츠 하나가 자국 문화의 파급력을 어디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지 완벽하게 증명한 무대였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김구 선생께서 꿈꾸셨던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는 나라’가 어느덧 현실이 되고 있다”고 했듯 높아진 K컬처의 위상 자체를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지난해 6월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케데헌’의 글로벌 누적 시청 수는 5억 회에 달한다. 시리즈, 영화 등 장르를 불문하고 역대 넷플릭스 콘텐츠 가운데 1위에 해당한다. 기존의 1위였던 ‘오징어 게임’을 제치고 선두에 오른 것이다. 넷플릭스의 전 세계 유료 가입자 수가 3억2500만 명 정도임을 감안하면 넷플릭스 이용자 대부분이 ‘케데헌’을 한 번 이상 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케데헌’이 정확히는 한국 작품이라 할 수 없다. 일본 제작사 소니픽처스가 만들었으며 미국 기반의 글로벌 OTT 넷플릭스에서 공개됐다. 하지만 작품 안은 온전히 한국의 문화들로 구성돼 있다. K팝이 소재로 활용됐고, 한국을 배경으로 펼쳐지며, 김밥이나 라면 같은 한국의 음식과 한국의 명소들이 나온다. ‘골든’과 같은 OST엔 영어와 함께 한국어 가사도 일부 들어가 있다. 특정 나라의 문화 자체가 콘텐츠로 만들어져 대대적인 글로벌 흥행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세계화가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문화의 장벽은 유독 높고 견고하다. 제품이나 서비스는 필요에 의해 쉽게 국경을 오갈 수 있고 사람도 이동할 수 있다. 하지만 특정 지역이나 국가의 문화가 다른 곳으로 확산되고 각인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케데헌’과 그 속에 담긴 한국 문화에 대한 전 세계의 열광적인 반응은 더욱 의미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콘텐츠를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작품에 나온 음식을 먹어보거나 명소를 직접 찾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펼쳐진 무대는 한껏 높아진 K컬처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오스카 시상식에선 보통 주제가상 후보 5곡의 축하 공연을 모두 진행해 왔다. 하지만 올해엔 시간 문제로 단 두 곡의 무대만 허용했는데 그중 하나가 ‘골든’이다. 특히 ‘골든’ 무대는 주요 부문인 작품상과 주연상 시상을 앞둔 3부에 펼쳐져 관심을 끌었다. 아카데미가 ‘골든’을 시상식의 분위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핵심 공연으로 삼은 것을 알 수 있다. 오스카 무대 위, K팝 최초의 무대는 그렇게 열리게 됐다.
해당 공연은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무대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이 무대에선 K컬처의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져 이색적인 풍경을 자아냈다. 먼저 한복을 입은 소리꾼들이 한국어로 된 판소리로 포문을 열었다. “어둠을 밝히려 우리 노래 부르리라. 굳건한 이 소리로 이 세상을 고치리라.” 이재를 비롯하여 ‘헌트릭스’가 입고 나온 금색 장식이 달린 흰 의상 역시 대한제국 황실 대례복을 모티브로 제작한 옷이라 화제가 됐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 전통 문화를 기반으로 한 K팝 ‘골든’이 오스카를 수놓았고 객석은 K팝 응원봉의 찬란한 불빛으로 물들었다. 글로벌 시장의 중심지인 미국에서, 그것도 세계 최고 권위의 영화 시상식에서 자국의 문화를 전면에 내세운 공연을 할 수 있는 경우는 과연 얼마나 될까. 그 어려운 일을 오랜 시간 비주류로 여겨졌던 K컬처가 해냈다는 점에서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될 것 같다.
K컬처 열풍은 앞으로도 ‘케데헌’을 비롯해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이어질 전망이다. 넷플릭스는 아카데미 시상식을 앞두고 ‘케데헌’ 속편 제작을 발표했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한국의 문화가 속편에도 담길 것으로 보인다. 이뿐만 아니라 ‘엑스오, 키티’ 시즌3, ‘성난 사람들’ 시즌2도 오는 4월에 넷플릭스에서 잇달아 공개된다. ‘엑스오, 키티’는 서울 국제고등학교로 유학 온 미국 소녀의 로맨스를 담은 작품이다. 한국을 배경으로 하며 한복, 한국 음식, 한국 명소 등 한국의 문화를 전면에 내세운다. ‘엑스오, 키티’ 시즌2는 ‘오징어 게임’ 시즌2와 비슷한 시기에 공개됐는데 ‘오징어 게임’을 누르고 글로벌 1위에 올라 화제가 됐다. ‘성난 사람들’ 시즌1은 우연한 자동차 사고를 계기로 서로에 대한 극한의 분노를 드러내는 두 남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출신 미국 이민자들의 힘겨운 현실을 그려 호평을 받았으며 에미상과 골든글로브상 등을 휩쓸기도 했다. 시즌2엔 송강호, 윤여정 배우가 출연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한인 창작자들의 활약이다. ‘케데헌’은 한국계 캐나다인인 메기 강 감독, 한국계 미국인 작곡가이자 가수인 이재 등이 참여한 작품이다. ‘엑스오, 키티’에선 한국계 미국인인 제니 한 작가가 각본과 총괄 프로듀서를 맡았다. ‘성난 사람들’은 한국계 미국인인 이성진 감독이 만들었으며 시즌1에 출연했던 한국계 미국인 배우 스티븐 연이 시즌2에서 프로듀서를 맡았다. 한국 문화와 해외 문화 두루 잘 알고 있는 한인 창작자들이 가교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물론 그들의 손에서 K컬처가 재탄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K컬처 산업의 발전을 위해 이들을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같이 높아진 위상에도 K컬처가 가는 길이 순탄치 않을 순 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케데헌’ 수상 소감 도중 주최 측이 퇴장 음악을 틀어 소감 발표가 중단되지 않았던가. 시간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라고는 하지만 인종차별이라는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전과는 분명히 다른, 새로운 길이 열린 것만은 확실하다. 메기 강 감독이 “‘저와 닮은 분들’이 주인공인 이런 영화가 나오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 미안하다. 다음 세대는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기다림은 이제 없다. 쉽진 않아도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았는가. 그래서 앞으로도 K컬처가 ‘케데헌’과 같은 기적을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된다.
김희경 인제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영화평론가 kimhk@inj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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