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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히 파고든 시벨리우스의 물결…이것이 '英 클래식 정수'

입력 2026-03-26 17:13   수정 2026-03-27 01:53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오랜만에 한국 땅을 밟았다. 무려 13년 만의 내한이다. 필하모니아와 런던 필하모닉, 런던 심포니(LSO) 같은 런던의 다른 악단이 2~3년마다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것과 다른 행보다. 이는 투어가 수입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다른 자치 악단과 달리 BBC 심포니는 방송 수신료를 주된 재원으로 하기 때문이다. 연간 예산에서 티켓 판매 등 상업적 활동을 통한 수입 비중은 20% 미만으로, 기본 인건비는 공적 재정이 뒷받침한다. 100여 명의 단원 모두 급여와 연금이 보장된 상근직이다.

이런 재정 구조는 악단의 투어 전략과 사운드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LSO 같은 민간 악단은 투어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보편적인 레퍼토리에 굵고 화려한 금관을 위시한 강렬한 사운드를 지향한다. 반면 BBC 심포니는 수익보다 공영 서비스의 가치를 우선시하며, 근현대 및 영국 레퍼토리 같은 색깔 있는 프로그램을 고수한다.

2013년부터 상임지휘자로 활동 중인 핀란드 출신 사카리 오라모는 이렇듯 우직한 방침을 고수하는 악단에 더없이 어울리는 수장이다. 오라모 체제 이후 악단은 시벨리우스를 위시한 북유럽 레퍼토리를 핵심 레퍼토리로 장착했고, 그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BBC 홈페이지는 지금도 이들의 시벨리우스 연주 실황을 반복 스트리밍 서비스하고 있다. 그 성과를 인정받은 오라모는 2030년까지 계약이 연장됐다.

지난 25일 서울 예술의전당 공연은 그들의 개성을 확인할 수 있는 무대였다. 특히 메인 프로그램인 시벨리우스 교향곡 2번은 이들이 전곡 사이클의 대미를 장식한 곡이다. 첫 곡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돈 후안’은 다분히 교향곡 2번 2악장에 작곡가가 심어놓은 ‘돈 후안’ 모티브와의 연결고리를 의식한 사전 포석으로 해석됐다. 지나치게 부풀리지 않는 현악, 요란하지 않고 서사에 충실한 목관과 금관은 BBC 심포니의 개성을 보여주는 표준적인 연주였다. 곡 특성상 근육질의 질감이 다소 아쉬웠지만, 이는 과시하지 않고 고른 색채를 유지하는 악단 고유의 개성으로 풀이된다.

이어진 손열음과의 버르토크 피아노 협주곡 3번은 바비칸 센터 공연(3월 16일)에서 가디언지로부터 별 4개 반(5개 만점)을 받아 기대되는 무대였다. 손열음은 민요적인 정서가 깃든 선율을 여유롭게 소화했다. 그 특유의 다이내믹과 파워를 강조하는 대신 서정성을 부각한 점이 악단과 훌륭한 조화를 이뤘다. 2악장에서 피아노가 바흐를 연상시키는 종교적인 분위기를 선보였고, 악단의 현이 정교하게 포개져 깊은 인상을 줬다. 헝가리 민속 리듬이 폭발하는 3악장에서도 그는 템포를 끝까지 밀어붙이기보다 구조가 무너지지 않는 선에서 탄력을 조절했다.

2부의 히어로는 단연 지휘자였다. 1부에서 절제된 제스처를 보이던 오라모는 시벨리우스 교향곡에서 액션을 키우며 자신의 해석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전체적으로 밝고 추진력 있는 템포를 기반으로 한 오라모의 시벨리우스는 곡에 내재된 비장함과 영웅 서사를 드러내면서도 민족주의적인 감성을 과장하지 않았다. 대신 유기적인 구조 위에서 차근차근 서사를 성장시키는 방식을 택했다.

특히 명상적인 드라마를 부각한 2악장이 백미였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첫 곡 ‘돈 후안’의 외형적인 서사와 대조를 이뤘다. 피날레에서도 오라모는 템포를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소리와 색채, 프레이즈만 조절해 승리의 대단원에 이르렀다. 이는 핀란드 민족주의를 넘어 모두에게 찾아오는 죽음의 그림자에 대한 보편적 수용으로 읽혔다. 두텁지만 과장 없는 금관, 뜨겁지만 선을 넘지 않는 현악이 이를 충실히 구현했다. 과장하거나 감정에 호소하지 않고 차분히 추구한 형식미가 궁극적으로 관객들의 감동을 끌어낸 셈이다.

익숙하지 않은 곡임에도 관객들은 뜨거운 환호와 박수로 화답했다. 오라모는 시벨리우스의 ‘슬픈 왈츠’를 앙코르로 연주하며 느지막하게 성사된 서울 데뷔 무대를 슬프지 않게 마무리했다.

노승림 숙명여대 교수·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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