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찍어내는 기계"…처자식 밟고 올라간 '역대급 성공남' 최후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입력 2026-03-28 00:01   수정 2026-03-28 00:13


“너는 내 작업실 바닥의 먼지만도 못해.”

그 남자,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연인에게 차갑게 내뱉었습니다. 이때까지 전 여자친구들에게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는 연인의 자존심을 짓밟고 공격해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자존심 높은 여성이라도 그 남자가 하는 말에는 진심으로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희대의 천재이자 미술계의 신과 같은 존재였으니까요. 하지만 이 여성, 프랑수아즈 질로만큼은 달랐습니다. 질로는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내가 먼지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당신의 빗자루에 쓸려가는 먼지가 아니에요. 내가 원할 때 스스로 떠날 수 있는 먼지죠.

7년 뒤 그녀는 피카소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이를 데리고 정말로 떠나버렸습니다. 피카소는 울고, 화내고, 매달렸습니다. 하지만 질로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피카소의 여인 일곱 명 중 그를 버린 사람은 질로가 유일합니다. 피카소에게 버림받거나 그의 곁에서 무너지지 않고, 유일하게 자기 인생을 온전히 살아낸 사람도 이 여자뿐이었습니다. 1,2편에 이어지는 마지막 3편에서는 피카소를 버린 여자, 천재의 최후, 그리고 그가 떠난 뒤 벌어진 일들을 이야기합니다.
체리 한 그릇
1943년 프랑스 파리. 피카소도 어느덧 환갑이 넘은 62세의 나이가 됐습니다. 온 파리 사람이 세계 최고의 예술가인 그를 알아봤습니다. 누구든 그를 발견하면 따라와 싸인 하나라도 얻으려 했습니다. 낙서라도 하나 받으면 그야말로 횡재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레스토랑에 앉아있던 피카소는 옆 테이블로 눈을 돌렸습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 거기 있었습니다. 피카소는 여성에게 체리 한 그릇을 건네며 말을 걸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프랑수아즈 질로. 스물한 살이었습니다.

둘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됐습니다. 질로는 법학을 공부하는 대학생이었지만 화가를 지망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림을 그려요. 화가가 되고 싶어요.” 피카소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당신처럼 예쁜 여자가 화가라니! 내가 들어본 것 중 제일 웃기는 얘기요.” 질로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예요?”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은, 얼마 안 돼 서로 사랑에 빠졌습니다.


질로는 피카소의 타고난 매력과 카리스마, 위대한 화가라는 위상에 끌렸습니다. 질로는 훗날 회고했습니다. “내 또래 남자들은 전쟁에 나가 있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죽는 시대였다. ‘죽기 전에 뭔가를 남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론 질로도 어렴풋이 알았습니다. 피카소의 성격과 나이를 봤을 때 이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을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요.

하지만 그녀는 피카소와의 관계를 ‘해볼 만한 인생의 도전’으로 여겼습니다. 피카소의 이전 연인들과 다른 점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어려울 걸 알면서도 자기 의지로 만났다는 것. 피카소의 명성과 후광에 지지 않는 동등한 위치에서 관계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다만 피카소는 아직 기존에 사귀던 연인, 도라 마르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질로를 만난 피카소는 늘 그렇듯 도라에게 더없이 잔인하게 굴었습니다. 질로를 데리고 도라의 집에 찾아가 “우리 관계는 끝났다”고 선언한 겁니다. 질로는 기겁해 따졌습니다. “어떻게 모두에게 이렇게 잔인하고 불쾌한 일을 벌일 수 있어요?” 피카소는 답했습니다. “너를 위해서 그런 거야. 내 인생에서 네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려고.” 질로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버림받은 도라는 무너졌습니다. 매일 새벽마다 피카소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피카소가 받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어두운 방에서 울리는 자신의 전화벨 소리는 피카소와 질로 사이에 끼어드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자신이 아직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피카소에게 알리는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질로는 그 모든 것을 곁에서 지켜봤습니다. 피카소가 여자를 버리는 방식, 버림받은 여자가 무너지는 모습. 질로가 훗날 피카소를 떠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도라의 이런 비참한 운명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꽃 같은 화풍
어쨌거나 피카소는 또다시 새로운 삶과 화풍을 시작했습니다. 질로와 함께 남프랑스로 내려간 그는 지중해의 햇살을 맞으며 밝고 경쾌한 색채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여인-꽃’(1946)에서 질로의 얼굴은 꽃 위에 올라가 있고, 몸은 줄기처럼 가늘게 뻗어 있습니다. 피카소는 말했습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자꾸 꽃의 형태가 나왔다.” 남들은 손주를 볼 나이에 아들(1947)과 딸(1949)도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피카소의 통제는 점점 심해졌습니다. 질로가 피카소 옆에서도 그림을 그렸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도 피카소는 그림 그리는 여성들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들은 모두 피카소 옆에서 그림 그리기를 멈췄습니다. 위대한 화가 옆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게 스스로 부끄러웠던 겁니다. 하지만 질로는 달랐습니다. 피카소는 그 점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불안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질로를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고립시켰습니다. “너는 내 작업실 바닥의 먼지만도 못한 존재야”라고 깎아내렸고, 질로가 떠나면 자살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다른 여자와의 관계를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흥미로운 건 이 시기 질로의 그림에 피카소와의 관계가 직접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아담이 이브에게 사과를 먹이다’라는 그림에서 질로는 피카소를 아담으로, 자기를 이브로 그렸습니다. 그런데 역할이 뒤집혀 있습니다. 이브가 스스로 사과를 따서 먹는 게 아니라, 아담이 이브의 입에 사과를 억지로 넣고 있습니다. 피카소와의 관계에서 질로가 느낀 압박을 한 장의 그림으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질로는 다른 여인들처럼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질로는 훗날 회고록에서 피카소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콤플렉스가 있는 남자. 과거의 연인들을 자신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 정확한 설명이었습니다.



1953년, 질로는 두 아이를 데리고 떠났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피카소는 즉시 보복에 나섰습니다. 자녀의 상속권을 박탈하려 했고, 프랑스 화랑에 압력을 넣어 질로의 전시를 방해했고, 질로의 그림을 사려는 컬렉터에게 “절대 그림을 사주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질로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에서 활동이 어려워지자 그녀는 미국으로 건너가 이전보다 더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1964년 질로가 회고록 <피카소와 함께한 삶>을 출간하자 피카소는 격분해 출판 금지 소송을 세 차례 냈지만, 전부 피카소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미다스의 손
질로가 떠난 뒤 72세의 피카소는 26세의 자클린 로크를 만났습니다. 46살 차이. 그녀와 피카소는 1961년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녀가 피카소의 마지막 여인이었습니다. 자클린은 질로와 정반대의 성격으로, 피카소를 헌신적으로 숭배했습니다. 피카소는 그녀에게 외부인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하는 ‘문지기’ 역할을 맡겼습니다.

그 이유는 이랬습니다. 당시 피카소의 명성과 부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피카소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다스 왕(마이더스 왕)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만지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하는 축복을 받은 왕. 피카소의 전기 작가 롤런드 펜로즈는 이렇게 썼습니다. “문자 그대로 피카소는 미다스 왕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연필로 그린 데생이나 낙서조차 황금으로 변했다.” 실제로 피카소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비를 내는 대신 냅킨에 그림을 그려 주곤 했습니다. 냅킨이 식사비보다 훨씬 비쌌기 때문에 모두들 감사히 여기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수표에 그림을 그려 넣는 장난을 치기도 했습니다. 수표에 적힌 가격보다 피카소의 낙서 값이 훨씬 비쌌기에, 수표를 받은 사람은 이를 현금으로 바꾸지 못했습니다. 피카소가 손을 대는 모든 것은 황금보다 비싸지는 세계였습니다.

그런데 미다스 왕의 이야기에는 뒷부분이 있습니다. 만지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하는 축복이 저주가 됐다는 것입니다. 먹으려는 음식도 황금이 되었고, 사랑하는 딸도 안아 주려다가 차가운 황금 조각상으로 만들었습니다. 미다스는 결국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아무도 안아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피카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뭘 그려서 발표하건 미술계는 환호했습니다. 피카소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좀 모자란 작품조차도 사람들은 돈다발을 싸 들고 와 “제발 팔아달라”고 애걸복걸했습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꿈 같은 일입니다. 하지만 피카소에게는 이런 상황이 불만이었습니다. 사람은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성장합니다. 하지만 피카소가 뭘 그려도 사람들은 그저 박수를 보낼 뿐이었으니, 그에게는 더 이상 어려운 게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발전이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평론가 존 버거는 말했습니다. “피카소는 성공에 갇혔다.”


그래서 피카소는 살아있는 화가들 대신 역사책과 미술관에서 경쟁 상대를 찾았습니다. 서양미술사의 거장들에게 도전장을 내민 겁니다. 그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58점 연작으로,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을 27점 연작으로, 들라크루아의 ‘알제의 여인들’을 15점 연작으로 재해석하는 등 수백 년 전 거장의 걸작을 자신의 화풍으로 다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컨대 벨라스케스가 하나의 시점에서 포착한 궁전 내부의 한순간을 피카소는 수십 개의 시점으로 해체하고 재구성했습니다. 같은 장면을 58번 다시 그리면서도 매번 구도와 색과 형태를 바꿨다는 점이 경이롭습니다. 중요한 건 이 작업이 미술계에 미친 영향입니다.



과거 거장의 작품을 참조하거나 오마주하는 전통은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원작을 수십 점 연작으로 해체하고 매번 다르게 재구성한 건 피카소가 처음이었습니다. 걸작이란 완성된 순간 박제되는 게 아니라, 수백 년이 지나도 다시 열어서 뜯어볼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 이는 이후 수많은 현대 미술가들이 과거 작품을 재해석하는 작업에 영향을 주며 미술이라는 문화 자체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습니다. 덕분에 이 연작은 피카소 말년의 대표작으로 평가받습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미술관에는 이 연작만을 위한 전용 전시실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피카소는 92세까지 매일 스스로 도전하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평생 남긴 작품은 수만 점. 피카소는 말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자서전을 쓰듯이 그림을 그린다. 그림 한 점 한 점이 나의 일기장 한 페이지다.” 1973년 4월 8일, 92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날까지 그는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피카소가 떠난 뒤
사람들은 피카소를 미술의 신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 신은 인간의 도덕이나 상식을 갖고 있는 ‘착한 신’이 아니었습니다. 기쁨도 슬픔도 사랑도 분노도 모조리 자기 그림의 재료로 사용했던 존재. 그게 피카소였습니다. 82세의 그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그림은 나보다 강하다. 그림이 나를 시켜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게 만든다.” 일반적인 화가는 그림을 그립니다. 피카소는 달랐습니다. 그는 자기가 그림을 지배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보다 더 큰 무언가에 끌려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림 그 자체가 피카소라는 화가를 움직였습니다. 연인도, 아이도, 친구도 그림 앞에서는 곁다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피카소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이런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먼저 옛 연인인 마리테레즈 발테르. 그녀는 피카소 사후에도 4년간 그를 잊지 못하다가, 1977년 목을 매 자살했습니다.

가족들도 대체로 불행했습니다. 피카소는 생전 가족들에게 ‘충성 경쟁’을 시키며 돈을 줬다 뺏기를 반복했는데, 이런 짓이 가족들의 정신을 갉아먹었습니다. 대표적인 게 장남인 파올로였습니다. 그는 평생 아버지에게 모욕적인 대우를 받으며 하인처럼 살다가 피카소 사후 2년 뒤인 1975년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습니다. 파올로의 아들이자 피카소의 손자도 피해자였습니다. 그는 할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려 했지만, 피카소가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을 싫어하던 자클린에 의해 거부당했습니다. 이후 그는 표백제를 마시고 자살했습니다.

자클린의 말로도 비참했습니다. 그녀는 피카소 사후 점점 바깥세상과의 접촉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1986년 59세의 나이로 권총으로 자살했습니다.


이쯤에서 피카소의 손녀 마리나의 말을 다시 꺼내야 할 것 같습니다. “제 할아버지는 흡혈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마리나는 이렇게도 썼습니다. “그의 그림 한 점 한 점에는 우리 가족의 피가 필요했습니다.” 그 말대로 피카소에게 중대한 도덕적 결함이 있다는 건 반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여성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커진 2020년대 들어 피카소는 예전 같은 인기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성주의 단체들이 피카소 전시장 앞에서 시위하는 등 여러 사건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런 인간성 나쁜 화가의 전시를 왜 열어주냐는 거죠. 실제로 서구 주요 미술관 중 피카소 전시를 여는 걸 꺼리는 곳도 늘고 있습니다.
피카소, 어떻게 봐야 하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카소가 남긴 업적까지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습니다. 입체주의는 현대미술의 출발점이었고, 게르니카는 한 장의 그림이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증명했습니다. 최악의 성격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피카소. 도대체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피카소의 여인 일곱 명 중 유일하게 그를 버렸고, 무너지지 않은 사람인 질로의 삶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아니라 천재였다. 그는 창조자이면서 동시에 파괴자였다. 그의 예술은 곧 그의 삶 자체였다.” 질로는 피카소의 그림이 위대하다는 사실과, 그 사람이 끔찍한 인간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피카소라는 자연재해 같은 사람에 휘말리지 않고 자신만의 균형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질로는 멋진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피카소의 방해에도 화가로서의 경력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퐁피두 센터 등 세계 주요 미술관이 그녀의 작품을 소장했습니다. 1970년에는 소아마비 백신 개발자 조너스 소크와 재혼했습니다. 그는 백신으로 떼돈을 벌 수 있었지만, 인류를 위해 특허권을 스스로 포기했습니다. 피카소처럼 모든 걸 자기 안으로 빨아들이는 천재가 아니라, 남을 위해 자기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영웅. 질로가 다음으로 선택한 남자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101세까지 살았습니다.

피카소에게 휘말려 자기 삶을 잃은 다른 연인 여섯 명, 그리고 자신의 행복을 찾은 질로에게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질로는 피카소의 그림을 사랑하면서도 다른 연인들과 달리 피카소라는 사람을 숭배하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작품과 끔찍한 인간성을 분리해서 볼 줄 알았던 것이지요.

장점을 인정하되 결함을 외면하지 않는 것. 아마도 그건 피카소라는 화가를 생각하는 가장 정직한 방법일 겁니다.

<i>*이것으로 피카소 칼럼 3부작을 마칩니다.</i>
<i>**이번 피카소 기사들은 A Life of Picasso (존 리처드슨 지음, 전 4권), Life with Picasso (프랑수아즈 질로, 칼턴 레이크 지음), Picasso: My Grandfather (마리나 피카소 지음), Loving Picasso: The Private Journal of Fernande Olivier (페르낭드 올리비에 지음), The Success and Failure of Picasso (존 버거 지음), Picasso and His Friends (페르낭드 올리비에 지음), Portrait of Picasso as a Young Man (노먼 메일러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문화재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국내 문화 분야 구독자 1위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미술 소식과 지금 열리는 전시에 대한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 구독 중인 8만명 독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세 권의 책으로 곁에 두실 수도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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