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라이프이스트-이성득의 아세안 돋보기] 호르무즈, 동남아 경제를 뒤흔들다

입력 2026-04-08 16:55   수정 2026-04-10 15:56

미국과 이란 간 전쟁이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국제 유가가 크게 요동치고 있다. 세계 원유 수송의 약 20%가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은 이번 사태의 핵심 변수다. 개전 이후 압박받던 이란이 해협 통항을 사실상 제한하면서 한국을 비롯한 글로벌 에너지 시장은 다시 한번 지정학적 리스크의 한복판으로 들어섰다. 시장은 단순한 가격 변동이 아니라 ‘공급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공포에 반응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은 단순한 해상 통로가 아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이라크 등 주요 산유국의 원유가 이 좁은 해협을 지나 아시아로 향한다. 이곳에서 병목이 발생하면 글로벌 에너지 시장은 곧바로 긴장 상태에 들어간다. 실제로 시장에서는 유가가 배럴당 150달러 수준까지 상승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문제는 단순한 가격 상승이 아니라, 그 상승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느냐다. 단기 충격은 버틸 수 있지만 장기화할 경우 세계 경제의 체력 자체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유가 충격은 동북아 국가들에도 부담이지만, 동남아에는 훨씬 더 구조적인 문제로 작용한다. 아세안은 겉으로 보기에는 자원이 풍부한 지역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요 경제국 대부분이 에너지 수입 의존 구조를 갖고 있다. 태국과 필리핀, 베트남은 모두 원유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이다. 특히 필리핀은 원유의 대부분을 중동에서 들여오고 있으며, 베트남 역시 빠른 산업화와 함께 에너지 수입 비중이 많이 늘어났다. 인도네시아는 한때 석유수출국기구 회원국이었지만 현재는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국내 생산 감소로 하루 약 90만~100만 배럴의 원유를 수입해야 하는 구조가 굳어졌다. 자원이 풍부하다는 이미지와 달리, 동남아 주요 국가들은 이미 전형적인 에너지 수입국으로 변모한 상태다.

더 큰 문제는 유가 상승이 이 지역 경제에 미치는 파급력이 훨씬 크다는 점이다. 동남아 국가들의 산업 구조는 제조업, 물류, 관광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는 곧 에너지 가격 변화에 경제 전체가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의미다. 유가가 상승하면 전력 생산 비용이 오르고 물류비가 증가하며, 항공 운임과 해상 운송비도 연쇄적으로 상승한다. 제조업 공장의 운영비 역시 상승 압력을 받는다. 이러한 비용 상승은 결국 소비자 물가로 전가된다. 특히 식료품과 생필품 가격 상승은 저소득층에 더 큰 타격을 준다. 경제 성장률이 둔화하는 동시에 체감 물가는 빠르게 올라가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형 압박’이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여기에 연료 보조금이라는 구조적 부담이 더해진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처럼 정부가 연료 가격을 일정 수준으로 억제하는 정책을 유지하는 국가에서는 유가 상승이 곧 재정 부담으로 직결된다. World Bank는 인도네시아의 경우 유가가 5달러 상승할 때 정부 보조금 부담이 GDP의 약 0.1% 증가할 수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유가 상승은 단순히 기업과 가계의 비용을 늘리는 것을 넘어 정부 재정까지 동시에 압박하는 구조를 만든다. 결국 물가 상승과 재정 악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이중 압박이 형성된다.


특히 인도네시아는 이번 유가 상승 국면에서 가장 큰 시험대에 올라 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2026년 에너지 보조금과 전력·연료 보전 예산으로 약 381조 루피아를 책정했는데, 이는 국제 유가가 배럴당 70달러 수준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나 유가가 90달러 안팎에서 지속될 경우 재정 적자가 GDP의 3.6% 수준까지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는 법정 상한선인 3%를 넘어서는 수치다. 그런데도 정부는 당장 연료 가격을 인상하기보다 다른 지출을 조정하고 재정 투입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충격을 흡수하려 하고 있다. 연료 가격 인상은 곧바로 민심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에너지 가격은 경제 문제가 아니라 정치 문제이기도 하다.

태국 역시 비슷한 딜레마에 놓여 있다. 정부는 디젤 가격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석유 기금과 세제 조정을 활용하고 있으며 가격 상한을 유지하려는 정책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기금 부담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물가를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재정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커질 수밖에 없다. 결국 가격을 억누를 것인지, 재정 부담을 감수할 것인지라는 선택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필리핀은 구조적으로 가장 취약한 국가 중 하나다. 원유와 가스 수입의 대부분을 중동에 의존하는 만큼 공급 차질이 발생할 경우 즉각적인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정부는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약 45일 수준의 비축 물량을 유지하면서 추가 원유 확보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비축 물량만으로 장기 충격을 버티기에는 한계가 있다. 공급망 자체가 흔들릴 경우 대응 수단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베트남은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대응을 보인다. 정부는 휘발유와 경유 등에 부과되던 환경 보호세와 일부 세금을 한시적으로 면제해 가격 상승 압력을 낮추고 있으며, 동시에 수입선을 다변화하고 국내 정유소 가동률을 높여 공급 안정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국내 정유 능력만으로 전체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외부 의존도를 완전히 낮추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동남아 각국이 선택할 수 있는 정책 수단은 크게 다르지 않다. 보조금을 확대해 가격 상승을 억제하거나 소비를 줄이거나 새로운 공급처를 찾는 방식이다. 그러나 어느 하나 완전한 해법은 아니다. 보조금을 늘리면 재정이 악화되고, 가격을 올리면 민심이 흔들리며, 공급선을 바꾸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번 사태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동남아 경제는 더 이상 저유가에 기반한 성장 모델을 전제로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산업 구조와 에너지 정책을 동시에 재편하지 않는 한, 유가 상승은 반복적으로 같은 충격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특히 전력 구조, 연료 보조금 정책, 에너지 수입 다변화 전략 등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고 있다.

전쟁은 언젠가 끝나겠지만, 그로 인해 드러난 구조적 취약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유가는 다시 안정될 수도 있지만 국가별 에너지 정책의 전환이 필요하다. 중동에서 시작된 전쟁이 동남아 경제의 체질을 냉혹하게 시험하고 있지만 아직 해결의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 어려운 시기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이성득 인도네시아 UNAS경영대학원 초빙교수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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