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K하이닉스가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 등 세계적인 인공지능(AI) 기업과 D램 장기공급 계약(LTA)을 맺는다. 빅테크가 가격 변동성이 큰 D램을 장기간 입도선매하고 나선 것이다. 세계적인 AI 인프라 투자 열풍에 따라 D램 공급 부족 우려가 커지자 빅테크가 데이터센터의 핵심 부품인 메모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장기공급 계약을 요구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 여파로 노트북·스마트폰 업계까지 메모리 수급 영향을 받아 제품 판매 가격을 올리는 추세다. 세계 D램 1, 2위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수급 불균형에 대응하기 위해 설비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구글과도 장기공급 계약을 맺기 위해 협의하고 있다. 주력인 고대역폭메모리(HBM)는 물론 서버에 들어가는 범용 D램 공급을 논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MS와 구글은 삼성전자와도 메모리 장기공급 계약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 이은 D램 3위 회사인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도 지난달 이런 형태의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도 빅테크가 최근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 잇달아 장기공급 계약을 제안한 것은 극심해진 메모리 품귀 현상 때문이다. 세계 전역에 AI 인프라 투자가 확대돼 메모리 물량이 크게 부족해지면서다. 가격도 치솟고 있다. 디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지난해 3월 1.35달러에 불과하던 DDR4 고정거래가격이 지난달 말 13달러로 급등했다.
게다가 AI 인프라 패권 전쟁이 장기화할 것으로 보이자 AI 기업들이 우선 물량부터 확보하는 전략으로 돌아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도체업계 고위 관계자는 “지금은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D램 물량 자체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국내외 다른 업체도 상황은 비슷하다. LG전자는 올해 초 출시한 LG 그램 프로 AI 2026 가격을 314만원에서 최근 354만원으로 13% 올렸다. 글로벌 업체 레노버는 30% 이상 인상했고, 에이수스 역시 15~25% 가격을 높였다. 미국 HP와 델 역시 올 2분기 대대적인 가격 인상을 공식화했다.
이런 가격 인상은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반도체 공급이 부족한 데 따른 것이다. 인공지능(AI) 열풍으로 메모리 제조사가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고부가가치 메모리 생산에 집중하면서 범용 메모리 공급을 줄였기 때문이다. 범용 D램(DDR4 8Gb 1G×8) 가격은 1년 사이 9배 이상 치솟았고, 낸드플래시도 2배 이상으로 올랐다. 노트북 제조 원가에서 메모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최근 25~30%까지 뛰어올라 핵심 부품인 중앙처리장치(CPU)나 그래픽처리장치(GPU) 가격과 맞먹는 수준이 됐다. 일부 제조사는 가격을 유지하는 대신 메모리 용량을 낮추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원가 압박을 완전히 상쇄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설명이다.
SK하이닉스는 충북 청주의 새로운 생산 거점인 M15X를 중심으로 HBM 신규 물량에 대응하고 있다. 본사가 있는 경기 이천캠퍼스도 최첨단 제품인 1c D램 공정 전환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D램 공급난 영향으로 두 회사의 올 1분기 실적은 역대 최대일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의 1분기 매출은 133조원, 영업이익은 57조2000억원으로 잠정 집계됐다. 추정 영업이익은 1분기 기준으로 기존 최대치인 2022년(14조1200억원)의 세 배를 웃도는 수준이다. 증권 업계에서는 SK하이닉스의 1분기 매출은 46조6252억원, 영업이익은 31조5627억원으로 추정했다.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7조4405억원)보다 4.2배 많을 것으로 추정됐다.
TSMC와 차세대 반도체 주도권 경쟁…2㎚ 기술도 다양한 개선 공정 내놔
메모리 사업에서 재미를 보고 있는 삼성전자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사업에서도 혁신 공정을 준비한다. 삼성전자는 2030년 1㎚(나노미터·1㎚=10억분의 1m) 공정을 도입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1㎚ 기술은 원자 알갱이 5개 크기의 연산 소자를 새로운 방법으로 배치한 ‘꿈의 반도체’ 공정으로 불린다. 이 같은 목표를 세운 것은 라이벌인 TSMC와 본격적인 기술 경쟁을 펼쳐 차세대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다. 삼성전자는 기존 최첨단 공정인 2㎚ 기술에서도 대형 고객사 확보를 위해 다양한 공정을 개발하기로 했다.
1㎚ 공정에는 소자 축소와 함께 ‘포크 시트(fork sheet)’라는 새로운 구조도 도입된다. 2㎚ 공정까지는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기술로 소자를 만들었다. 전류가 흐르는 길을 기존 3개 면에서 4개 면으로 늘려 전력 효율을 극대화한 것이다.
이 GAA 소자 사이의 거리를 최대한으로 좁힌 기술이 포크 시트다. GAA 소자 사이에 마치 포크를 꽂듯이 전기가 통하지 않는 벽을 세우는 기술이다. 예컨대 한 마을에서 집과 집 사이에 잔디밭을 배치하던 기존 구조에서, 거대한 콘크리트 벽을 세우는 구조로 바꾸는 식이다. 잔디밭을 없앤 만큼 더 많은 유휴 공간이 생겨 집을 더 많이 지을 수 있는 것처럼, 같은 칩 면적에 더 많은 소자를 배치할 수 있다는 얘기다.
삼성전자는 2019년 ‘2030년 시스템 반도체 1위 비전’을 발표했을 때부터 첨단 공정만큼은 TSMC를 쫓아가겠다는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2019년 세계 처음으로 7㎚ 극자외선(EUV) 노광 공정을 도입했고, 2022년엔 세계 최초로 3㎚ 공정에서 GAA 소자를 적용했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매출과 생산 규모 면에서 TSMC를 넘어서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지만, 기술적 측면에선 경쟁을 이어가고 있다”며 “지난해 테슬라에서 165억달러(약 25조원) 규모의 2㎚ 인공지능(AI) 칩 공급 계약을 따낸 게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대표적 성과”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는 현재 최첨단인 2㎚ 기술에서도 다양한 개선 공정을 내놓고 있다. 테슬라의 2㎚ 칩 ‘AI6’ 양산을 위해 맞춤 공정인 ‘SF2T’를 개발 중이다. 이 칩은 2027년부터 삼성전자의 새로운 파운드리 거점인 미국 테일러 공장에서 생산된다. 삼성전자 시스템LSI사업부의 새로운 스마트폰용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생산을 위해 올해부터 활용할 새로운 2㎚ 공정인 ‘SF2P’, 내년에 가동할 ‘SF2P+’ 등의 개발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현재 2㎚ 공정 수율이 최고 60%를 넘으면서 생산성이 올라간 만큼 올해 흑자 전환 기대도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삼성전자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사업부는 지난달 미국에서 개최된 OFC 2026라는 학회에서 실리콘 포토닉스를 2028년부터 양산하는 로드맵을 공개했다. 실리콘 포토닉스는 전기 대신 빛으로 데이터를 주고받는 기술이다. 구리 회로로 데이터를 주고받는 현재 방식과 비교하면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진다. 삼성전자는 실리콘 포토닉스에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스템 반도체 파운드리, 패키징까지 묶은 ‘턴키’ 전략으로 TSMC 추격에 속도를 올린다는 구상이다.
강해령/김채연 기자 hr.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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