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에 사진을 그리는 이정진…"촬영은 한 달, 후작업은 10개월"

입력 2026-04-15 12:56   수정 2026-04-15 12:57



“촬영에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지만, 후반 작업이 열 달 넘게 걸렸습니다”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PKM 갤러리, 6년 만에 한국에서 전시회를 여는 사진작가 이정진이 작품 앞에 섰다. 화면을 채운 흑백의 풍경은 회화와 사진의 경계를 오간다. 연필로 그린 데생같기도 하고, 먹으로 작업한 수묵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필름카메라로 촬영한 흑백 사진이 떠오르기도 하는 작가의 작품은 보는 이의 다양한 시선을 자극한다.

홍익대학교에서 도예를 전공하던 이정진 작가는 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사진에 깊게 매료됐다. 이후 그는 월간 잡지 <뿌리 깊은 나무>의 사진 기자로 일했다. 사진 작가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을 20대 중반 울릉도에서 심마니 노부부를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부터다. 1년간 이들을 밀착 취재한 사진을 책으로 출간한 작업으로 세계적 관심을 얻었다. 이 작업을 발판으로 다큐멘터리 사진의 거장 로버트 프랭크의 조수로 일할 수 있었고,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사진을 공부했다.




이정진 작가가 PKM 갤러리 전관에서 개인전 ‘Unseen/Thing’을 진행한다. 2024년 아이슬란드의 풍경을 담은 ‘Unseen’ 시리즈와 2003년 시작한 작가의 유일한 스튜디오 작업 ‘Thing’ 시리즈가 전시장에 나왔다. 얼어붙은 아이슬란드의 빙하와 산맥을 담은 ‘Unseen’ 시리즈는 지난해 영국에서 먼저 공개된 후 영국 가디언즈와 파이낸셜타임즈의 호평을 얻었다. 두 작업에는 20년이라는 간극이 있지만 공통분모를 공유한다. 작가는 “두 시리즈의 대비가 재밌는 점은 옷의 안감과 겉감처럼 하나를 이룬다는 것”이라며 “사물을 촬영한 ‘Thing’ 시리즈는 안의 기운을 담았고, ‘Unseen’은 밖의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것이라 다르지만 그러면서도 어떤 연결고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전했다.

작가는 전통 한지에 빛을 만나면 이미지가 생기는 감광유액을 붓으로 칠한 후 인화하는 방식을 고안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그가 최근 작업 방식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기존과 똑같은 방식으로 한지에 인화한 사진을 디지털로 스캔해 포토샵 등의 프로그램으로 조정하며 작가가 카메라 렌즈를 통해 경험한 감정을 재현하는 방식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국내 처음으로 선보이는 ‘Unseen’ 시리즈가 이 방식을 통해 완성됐다.



그는 20년 넘게 주로 자연 풍경을 촬영했다. 1990년대 미 대륙을 여행하며 사막을 촬영했고, 이후 2010년에는 국제 사진 프로젝트 ‘This Place’에 유일한 아시아 작가로 참여해 토마스 스트루트, 스테판 쇼어 등 세계적 사진 거장들과 함께 이스라엘 분쟁 지역을 기록했다. 2024년 그가 향한 행선지는 아이슬란드였다. 이미 사막과 황무지를 경험해본 터라 비슷한 자연의 풍경을 기대했지만 아이슬란드의 기운은 그의 예상과 달랐다. 작가가 느낀 감정은 결과물에도 확연히 드러났다. 이정진 작가는 사막과 아이슬란드의 차이에 대해 “정적이고 고요한 사막에서 천천히 명상하듯 작업했다면, 급변하는 아이슬란드의 날씨는 공포스러울 정도로 거칠게 다가왔다”며 “자연의 위력 앞에 흔들리던 제 감정을 반영해 아이슬란드 작업물에는 콘트라스트를 더욱 강조했다”고 밝혔다.



아이슬란드에서의 촬영은 빠르게 진행됐다. 한 장소에서 많은 컷을 찍지도 않았고, 한 번 촬영한 장소는 다시 방문하지도 않았다. 반면 작업할 사진을 고르고 들여다보며 완성하는 데는 오랜 시간을 들였다. 작가는 여러 컷을 촬영하지 않는 것에 대해 “제가 대면한 그 순간의 느낌이 제일 강렬하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사진에 풍경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감정을 오롯이 표현하는 데 많은 공을 들인다. 이 결과 ‘Unseen’ 시리즈는 촬영에는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지만, 후반 작업에만 10개월이 넘게 소요됐다.



한지 역시 작가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다. 1989년 처음 한지를 사용한 이후 줄곧 한지에 감광유제를 바르는 수작업을 고집해온 작가는 조수에게 이 과정을 맡기지 않는다. 유액을 붓으로 바르는 과정에서 얼룩이 남을 수 있어 오랜 내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캄캄한 현상실에서 한지에 균일하게 유액을 도포하는 일은 고도의 집중력과 체력을 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이 수고스러운 작업을 이어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한지는 현상액에 담가도 쉽게 풀어지지 않을 만큼 내구성이 뛰어나고, 감광유액을 바르면 마치 피부처럼 깊은 곳에서 이미지가 배어 나오는 질감을 만들어낸다”며 “이러한 한지의 물성은 관람자가 사진을 단순히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체험하도록 만드는 힘을 지녀 포기할 수 없는 부분 중 하나”라고 전했다. 전시는 5월 23일까지.

강은영 기자 qboo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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