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G를 향한 시장의 평가가 달라지고 있다. 반도체와 방산, 전력주가 코스피를 끌어올리는 동안 잠잠했던 LG그룹이 최근 로보틱스 밸류체인을 완성한 기업으로 다시 평가받고 있다.
휴머노이드에 필요한 AI 두뇌·로봇 센서·관절·배터리를 계열사 안에서 모두 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 내재화 역량까지 더하면 국내 어느 그룹도 갖추지 못한 밸류체인이 완성된다.
증권가도 4월 LG전자, LG디스플레이, LG이노텍, LG에너지솔루션 등 주요 계열사 목표주가를 올려잡았다. 지난해 주력 사업 부진에 흔들렸던 LG가 올해 들어 신사업 윤곽이 뚜렷해지면서 기업가치 재평가가 가능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취임 이후 8년 동안 LG 포트폴리오 전환을 주도한 구광모 회장의 최근 동선은 LG의 방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지난 3월 말 구 회장은 서울에서 출발해 미국 동부에 위치한 LG에너지솔루션의 ESS 자회사 버테크(Vertech)를 거쳐 지구 반대편 브라질 마나우스에 위치한 LG전자 생산법인을 찍고 팔란티어 등 딥테크 기업 수장과의 만남을 위해 다시 미국 서부 실리콘밸리를 찾았다.
이동거리만 약 3만8000km에 달한다. 구 회장이 지구 한 바퀴에 가까운 거리를 한 주 만에 소화하며 고강도 현장경영 행보를 펼친 것이다. 각 출장지의 공통분모는 AI였다. LG그룹이 그리는 미래 생존방정식이 선명해졌다는 평가다.

회사가 공개한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의 상용화를 앞두고 배터리 공급 업체에 대한 궁금증도 커졌다. 전기차가 ‘캐즘(수요 정체)’에 들어서면서 로봇이 배터리 기업의 다음 무대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시장이 예측한 기업은 삼성SDI였다. 현대차의 4륜형 모빌리티 로봇 플랫폼인 ‘모베드’에 배터리를 공급하는 삼성SDI가 아틀라스의 배터리도 공급할 것이란 기대였다. 이 기대감에 지난 1월 한 달 동안 삼성SDI 주가는 40%가량 뛰었다.
하지만 시장의 예상을 깨고 보스턴다이내믹스가 선택한 기업은 LG에너지솔루션이었다. LG에너지솔루션은 테슬라의 휴머노이드 ‘옵티머스’ 배터리 공급사로도 알려져 있다.
휴머노이드 로봇 시장을 이끄는 테슬라와 현대차를 모두 고객사로 확보한 것이다. 이를 포함해 6개 이상의 글로벌 로봇 업체와 제품 공급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LG의 진짜 강점은 배터리뿐만 아니라 로봇 밸류체인 전체를 아우르는 제조 역량이다. LG이노텍도 지난해 5월 보스턴다이내믹스와 로봇용 부품 개발을 위한 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에 따라 양사는 로봇의 ‘눈’ 역할을 하는 ‘비전 센싱 시스템’을 공동 개발한다. LG이노텍은 보스턴다이내믹스에서 개발한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의 차세대 모델에 장착될 ‘비전 센싱 모듈’을, 보스턴다이내믹스는 ‘비전 센싱 모듈’에서 인식된 시각 데이터를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소프트웨어를 개
발한다.
LG이노텍은 로봇의 핵심기술인 자율주행을 위한 투자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7월 라이다 기술 선도 기업인 미국 아에바(Aeva)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했고, 같은 해 9월 4D 이미징 레이더 전문기업 스마트레이더시스템에 전략적 지분 투자를 단행했다. 최근에는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전문 기업인 미국의 어플라이드인튜이션(Applied Intuition)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휴머노이드 로봇 시장 규모는 2035년까지 51조원에 달할 것이란 전망이다. 휴머노이드 로봇에는 카메라 모듈뿐 아니라 반도체 기판, 관절 구동장치 등 각종 부품들이 탑재될 전망으로, 관련 원천기술을 다수 확보하고 있는 LG이노텍은 로봇용 부품 시장 선점에 유리한 상황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LG전자는 60년간 가전 사업에서 쌓아온 모터 노하우를 로봇에 심는다. 휴머노이드 로봇의 핵심 구동 부품인 액추에이터 사업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액추에이터는 모터와 감속기, 제어기, 센서 등을 결합한 구동 장치로 로봇의 손가락과 팔다리 등 관절을 정확하게 움직이게 한다.
류재철 LG전자 사장은 올해 정기주주총회에서 “LG전자는 올해를 로봇 사업 본격화의 원년으로 삼고 이를 위한 세부 전략을 속도감 있게 실행하고자 한다”며 “특히 로봇 원가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핵심 구동계인 액추에이터를 직접 설계, 생산해 전 세계 로봇 제조사에 공급하는 B2B 부품 사업을 본격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LG전자는 지난해 말 조직개편에서 HS로보틱스연구소를 신설하면서 전사에 흩어져 있던 홈로봇 관련 역량을 모았다. 집 내 다양한 변수에 대한 대응력을 높이기 위해 글로벌 빅테크와의 협력도 강화하고 있다.
LG전자가 지난 1월 ‘CES 2026’을 통해 선보인 휴머노이드 로봇 ‘클로이드’는 엔비디아의 고성능 칩셋 ‘젯슨 토르’를 기반으로 개발됐으며 엔비디아 ‘아이작’ 플랫폼으로 디지털트윈 환경에서 훈련한다. 또한 구글의 생성형 AI ‘제미나이’를 기반으로 고객과 일상 언어로 대화하며 그 맥락을 이해한다.
LG전자는 액추에이터를 포함한 부품부터 클로이드에 이르는 완제품까지 아우르는 전방위 공략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LG디스플레이는 로봇의 얼굴과 몸통에 적용되는 디스플레이 분야에서도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업계에서는 유일하게 곡면 구현이 가능한 LG디스플레이의 P-OLED(플라스틱 OLED)가 휴머노이드용 디스플레이에 최적화된 패널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LG CNS는 제조·물류·유통 등 수많은 산업 현장에서 축적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로봇이 현장의 언어와 규칙을 이해하는 ‘산업 지능’을 갖추도록 훈련시키며 피지컬 AI 상용화를 이끌고 있다.
산업 현장에 투입되는 로봇은 동작 구현을 넘어선 정밀한 훈련체계가 필요하다. LG CNS는 미국·중국 로봇 기업들과 다수의 개념검증(PoC)을 통해 역량을 고도화하고 있다. HD현대로보틱스와는 AI 기반 휴머노이드 로봇과 물류 자동화 기술개발 협약을 맺고 조선소 품질 검사 휴머노이드 실증을 진행 중이다. 이 같은 현장형 실증의 바탕에는 로봇이 작업 맥락과 환경을 스스로 이해하도록 만드는 AI 두뇌 기술이 자리 잡고 있다.
로봇 두뇌에 해당하는 ‘로봇 파운데이션 모델(RFM)’은 피지컬 AI 실현의 핵심 기술이다. LG CNS는 지난해 6월 미국 RFM 전문기업 스킬드(Skild)AI에 투자·파트너십을 체결하고 산업 현장의 행동 데이터를 RFM 학습에 반영해 맞춤형 로봇을 구현하고 있다. 휴머노이드 양팔 제어 특화 RFM 기업 컨피그(Config)와 파트너십을 확대하기도 했다.
두뇌 역할을 하는 AI 기술력도 이미 세계적인 수준이다. 오픈AI의 챗GPT가 세상에 등장하기 이전인 2020년에 LG AI연구원을 출범한 LG는 2021년에는 국내 최초 멀티모달 AI 모델 ‘엑사원 1.0’을 개발하며 AI 연구에 앞장서 왔다.
최근에는 ‘엑사원 4.5’를 출시하며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성능 측정에서 오픈AI의 GPT 5-mini, 엔트로픽의 클로드 소넷 4.5, 중국 알리바바 큐웬3 235B 모델을 앞서는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Fn가이드에 따르면 4월 증권가는 LG전자의 목표 주가를 13만~14만원대로 일제히 올리며 매수 의견을 던졌다. 14일 종가 기준 37만500원을 기록 중인 LG이노텍의 목표 주가는 46만원을 상회한다. 40만원 수준의 LG에너지솔루션 목표주가로 67만원을 제시한 증권사도 있었다.
신사업 기대감에 더해 실적과 사업 구조까지 개선되면서 LG 계열사의 펀더멘털이 달라지고 있다는 평가다.
LG전자는 올해 1분기 매출 23조7330억원을 기록했다. 1분기 기준 역대 최대 규모다. 영업이익은 1조6736억원으로 잠정 집계됐다. LG전자는 지난해 4분기 약 9년 만에 분기 영업손실을 냈지만 곧바로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실적 반등은 생활가전(HS)과 TV 사업을 담당하는 미디어엔터(MS) 사업이 체질 개선에 성공하면서 이뤄졌다. HS 사업은 가전 구독과 온라인 판매 비중을 늘려 수익성을 극대화했다. 일회성 판매에 머물던 가전 사업에 관리·서비스를 결합한 구독 모델이 더해지면서 수익 기반이 안정됐다. TCL, 하이센스, 샤오미 같은 중국 업체들에 시장 주도권을 내줬던 TV 사업은 광고·콘텐츠·서비스를 결합한 웹OS 플랫폼 사업이 가파르게 성장하면서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전장(VS) 사업의 성장세는 더 상징적이다. LG전자는 미래차 부품을 앞세운 B2B 사업을 키워왔고 지난해에는 처음으로 B2B 영업이익이 B2C를 넘어섰다.
LG에너지솔루션 주가는 50만원대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2차전지의 새로운 성장축으로 떠오른 에너지저장장치(ESS) 사업 역량이 커지고 있고 최근 벤츠와 누적 25조원 이상의 수주를 기록하며 K배터리의 힘을 키우고 있다.
구광모 회장은 지난 3월 30일 미국 매스추세츠주 웨스트버러에 위치한 LG에너지솔루션 ESS SI(System Integration) 자회사 버테크를 방문해 AI 시대를 뒷받침할 ‘에너지 인프라’ ESS 사업을 점검했다.
AI 데이터센터와 피지컬 AI 등 미래 배터리 수요가 급격히 확대되는 국면에서 ESS 관련 사업기회를 선점하기 위해서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결합한 통합 솔루션 역량이 중요 경쟁력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특히 ESS는 에너지 전략 물자 성격이 강한 안보자산으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미국-이란 전쟁의 영향으로 재생에너지와 ESS 조합에 대한 기대가 커졌고, LG는 이 같은 시장 상황을 빠르게 읽고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글로벌 ESS 주류로 부상한 LFP(리튬인산철) 배터리를 적기에 도입했으며 북미 수요 급증에 맞춰 현지 생산 거점 5곳을 ESS 생산라인으로 전환하고 있다. 현재 북미에서 ESS 배터리를 생산해 공급하는 기업은 LG에너지솔루션이 유일한 만큼 테슬라, 테라젠, 엑셀시오에너지캐피털, EG4, 한화큐셀 등 글로벌 고객사와 잇따른 공급 계약을 체결하며 수주잔고를 확대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 미시간주 홀랜드와 캐나다 온타리오주 윈저의 단독 공장에서 ESS를 생산하고 있으며 2027년부터 미시간주 랜싱에 위치한 단독공장에서 ESS 생산을 시작한다.
건설 중인 미국 오하이오주 파예트카운티에 위치한 혼다와의 합작공장과 테네시주 스프링힐에 위치한 GM과의 합작공장은 올해 가동을 시작할 예정이다. 이를 바탕으로 LG에너지솔루션은 글로벌 생산량을 60기가와트시(GWh)로 늘리고(북미에서만 50GWh) ESS 매출도 전년 대비 3배 이상 늘린다는 계획이다.
김현수 하나증권 애널리스트는 “LG에너지솔루션의 2026년 영업이익 중 절반 수준이 ESS에서 발생할 것으로 전망된다”며 “지정학적 리스크에서 자유로운 재생에너지와 ESS 조합에 대한 기대감이 부각되는 등 오는 2분기부터는 ESS 배터리의 성장이 본격화되며 매출과 이익 개선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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