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방산의 호황 이면에서 거물들의 소리 없는 ‘공급망 전쟁’이 한창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은 현대위아와 현대로템의 방산 부문 통합을 통해 한화가 의존해온 ‘포신 공급망’을 장악하고 수직계열화에 박차를 가한다.
이에 맞서 한화그룹은 미국 본토에서 ‘디지털 탄약 표준’을 설계하며 경쟁사의 무기 체계를 자사 생태계에 유도하는 플랫폼 전략을 가동했다. 이제 승부는 단순 판매량이 아닌, 제조 상류와 데이터 규격의 통제권에서 갈린다. 거물들의 생존 게임을 5가지 핵심 쟁점으로 해부한다.
현대차그룹 지배구조에서 현대위아는 정의선 회장의 지분이 섞인 직계 계열사지만 현대로템은 현대차가 지분을 보유한 방계에 가깝다. 그럼에도 현대차가 위아의 화포 부문을 로템에 이식하는 건 ‘돈이 되는 사업’을 한곳에 몰아주기 위해서다.
흩어진 방산 자산을 합쳐 덩치를 키우고 사업 구조를 단순화하겠다는 의도다. 이번 재편이 끝나면 현대로템은 차체부터 포신, 장갑까지 생산 전 과정을 수직계열화하는 구조를 갖춘다.
업계에서는 현대로템의 몸값을 키워 향후 상장이나 별도 법인화를 추진할 경우 현대차가 거둘 자본 이득이 수조원대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위아도 방산 색채를 걷어내고 자동차부품 전문사로 시장의 재평가를 노릴 수 있다. 결국 정 회장은 계열사 간의 명분보다 ‘방산 복합체’라는 실리를 택해 한화에 맞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대항마를 현대로템으로 낙점한 셈이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K9 자주포의 아킬레스건은 ‘포신’에 있다. 전통적으로 현대위아가 독점 공급해온 155mm 포신은 자주포의 화력을 결정짓는 핵심 부품이다. 한화가 일부 생산 능력을 확보했으나 사거리 70km급 차세대 장거리 포신 기술에서는 현대위아에 상대적으로 뒤처진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올 하반기 현대로템이 위아의 화포 기술을 흡수하면 한화는 경쟁사 부품에 안방을 내주는 구조에 놓인다. 로템은 이를 강력한 레버리지로 활용할 방침이다. 한화에 포신을 공급하며 단가 협상권을 쥐는 동시에 자사 자주포 사업의 원가 경쟁력을 높이는 ‘양면 작전’을 구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화가 탄약 표준으로 압박하면 로템은 포신 공급망으로 맞불을 놓는 셈이다. 한화는 무인화 자주포(K9A3) 설계 주도권을 쥐고 폴란드·호주 현지 생산을 통해 위아 의존도 낮추기에 사력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경량 합금 소재와 수명 연장 기술이 집약된 차세대 포신 기술 격차를 단기간에 메우기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다. 업계에서는 한화가 이 ‘포신의 덫’을 완전히 벗어나는 데 최소 3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글로벌 행보를 보면 최근 ‘풍산 노딜’은 협상 실패가 아닌 치밀한 전략적 선택이었음이 드러난다. 타임라인이 이를 보여준다. 한화는 풍산 탄약사업부 인수 논의 결렬(2026년 4월)보다 4개월 앞선 2025년 12월 이미 미국 델라웨어 법인(HDUSA)을 설립하고 1.5조원 규모의 탄약 공장 건설을 확정했다.
풍산과의 결렬은 미국행의 이유가 아니라 독자노선을 확정한 뒤 발생한 결과에 가깝다. 실제 협상 과정에서 풍산은 합작법인 지분 50% 이상과 경영권 보장, 나아가 한화의 핵심 플랫폼 기술 공유를 조건으로 내건 것으로 알려졌다.
한화로선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도 기술유출 리스크만 떠안는 조건이었다. 특히 풍산은 협상 기한을 연장하며 한화의 최종 제안을 유도한 뒤 불과 엿새 만에 기습적으로 매각 철회를 공시했다. 한화 내부에서 “풍산이 기업가치만 확인하고 신의를 저버렸다”는 배신감이 팽배한 이유다.
결국 한화는 풍산 대신 스마트 탄약 시스템을 갖춘 미국 유니온테크놀로지스를 파트너로 택했다. 2026년 3월 미 육군 자주포 사업 제안에 이어 4월 마그넷디펜스와 무인 수상정 생산에 착수하며 미 전쟁부(국방부) 공급망에 직접 안착했다.
이제 미국 현지에서 미군 무기를 생산하는 한화에 국내 공급망의 독점권은 더 이상 유효한 협상 카드가 아니다. 한화의 시선은 이미 국내를 넘어 글로벌 표준을 향하고 있다.

한화의 진짜 무기는 단순 생산량이 아닌 미군 공급망 내부에서의 ‘영향력’에 있다. 미 전쟁부 조달시스템은 현지 생산 거점을 가진 파트너에게만 문을 연다. 한화는 미국 아칸소주 무기고를 확보하고 노스롭그루먼과 손잡으며 미군 공급망의 핵심 ‘인사이더’가 됐다.
단순히 탄약을 많이 팔겠다는 걸 넘어 미군이 설계하는 차세대 지능형 탄약 운용 체계에 자사의 기술을 깊숙이 박아넣겠다는 포석이다. 이 전략의 핵심은 하드웨어를 넘어선 소프트웨어적 결합이다.
한화는 탄약의 잔여 수량과 성능을 실시간 관리하는 디지털 체계를 미군과 공동 개발하고 있다. 탄약은 소모품이지만 전차가 운용되는 내내 사야 한다. 한화가 이 관리 솔루션의 표준을 선점하면 로템이 만든 전차라도 한화의 데이터 생태계와 연동될 때 최상의 작전 성능을 내게 된다.
결국 한화는 탄약이라는 소모품을 매개로 고객을 자사 생태계에 묶어두는 ‘플랫폼 비즈니스’를 설계한 셈이다. 이 시나리오가 완성되면 현대로템의 전차 수출조차 한화가 선점한 지능형 데이터 규격을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가 형성된다. 무기 체계의 ‘심장’인 화력 공급망을 장악해 제조사(현대로템)를 압박하는 구도를 미 본토에서부터 완성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한화가 탄약 규격을 앞세워 공급망 하류를 선점하는 사이 현대로템은 그룹사 역량을 결집한 ‘테크 기업’으로의 체질 개선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용배 사장이 올해 주총에서 공표한 1.8조원의 신사업 투자는 방산 매출을 재투자의 원천으로 삼되 기업 정체성을 미래 모빌리티로 재편하겠다는 포석이다. 단순히 한화에 대한 대응을 넘어 기존 내연기관 엔진 체계를 차세대 메탄 엔진과 수소 기반 전차로 교체해 시장 자체를 재정의하겠다는 전략이다.
현대차그룹은 포티투닷(SDV)의 소프트웨어 기술과 보스턴다이내믹스의 피지컬 AI 알고리즘을 방산 영역과 융합하는 시도를 지속하고 있다. 하드웨어가 범용화되는 시대에 소프트웨어가 승패를 가른다는 논리다.
레벨4 자율주행 알고리즘이 전차에 이식되면 무인 정찰과 교전은 테슬라처럼 소프트웨어 업데이트(OTA)만으로 고도화된다. 한화가 아무리 파괴력 높은 탄약을 만들어도 전차 자체가 지능형 소프트웨어 덩어리가 되면 주도권은 자율주행 알고리즘을 쥔 로템에 넘어간다.
특히 보스턴다이내믹스의 로봇 제어 노하우는 전차가 스스로 지형을 인식하고 최적의 작전 환경을 계산하는 기술적 토대가 된다.
보스턴다이내믹스 기술의 직접적인 군사 전용에는 엄격한 규제와 계약 조건이 따르지만 그 기저에 깔린 고도의 인공지능 및 센서 융합 기술을 방산 플랫폼 고도화에 간접적으로 활용하면 한화가 가보지 못한 테크 영역을 선점하는 구조를 만들 수도 있다.

단기적으로는 ‘제조 완결성’을 확보한 현대차그룹이 승기를 잡는 모양새다. SDV·로봇·수소 기술은 이미 작동 중이고 하반기 현대위아 통합 이후 현대로템은 포신까지 갖춘 완전체가 된다. 영업이익 1조, AA- 등급은 로템이 그룹의 핵심 캐시카우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5년 이후의 장기전은 ‘규격 주도권’을 설계 중인 한화로 무게추가 옮겨갈 가능성이 높다. 미국 시장에서 탄약 및 데이터 표준을 선점할 경우 하드웨어 제조사인 로템은 결국 한화가 깔아놓은 생태계를 따라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방산 공급망의 정점은 제조권도, 화력도 아닌 ‘전장의 기준(Standard)을 쥐는 자’의 몫이라는 점이다. 전쟁터는 이제 한국이 아니라 미국, 그리고 보이지 않는 규격의 세계로 확장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방산 거물은 상호의존적 공생관계다. 현대로템의 전차는 한화의 탄약이 필요하고 한화의 탄약은 로템의 전차라는 플랫폼이 절실하다. 이 공생이 파괴될지, 혹은 새로운 형태의 동맹으로 진화할지는 미군 입찰 결과와 현대로템의 신사업 수익화 속도에 달려 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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