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점 온 TV 성능경쟁…삼성 '콘텐츠 플랫폼' 승부수

입력 2026-05-04 17:55   수정 2026-05-04 17:56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전까지 가전시장의 왕좌는 단연 TV였다. 브라운관에서 플라즈마디스플레이패널(PDP), 액정표시장치(LCD), 유기발광다이오드(OLED)로 이어진 진화의 역사는 하드웨어 기술의 한계를 시험하는 장이었다. 누가 더 얇고 선명한지, 더 거대한 화면을 구현하는지가 시장의 패권을 결정했다. 삼성전자가 지난 20년간 세계 TV 시장을 호령한 비결도 경쟁사를 압도하는 기술력이었다. 사업 수장도 늘 내로라하는 ‘기술통’들이 맡았다.

삼성전자는 이번에 TV 사업의 오랜 경영 기조를 180도 뒤집는 파격 인사를 단행했다. 4일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VD) 신임 수장 겸 서비스 비즈니스팀장에 마케팅 전문가인 이원진 사장을 임명했다. 20년 넘게 이어온 ‘기술 중심’ 경영에 마침표를 찍고 ‘플랫폼 기업’으로의 전환을 공식화한 것으로 풀이된다.

◇ 이원진, ‘소프트웨어 리더십’ 이끈다
삼성전자가 이런 결정을 내린 건 TV 시장의 패러다임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이제 사람의 맨눈으로 8K 이상의 TV 화질 차이를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화면 크기도 거실 벽면을 가득 채울 만큼 커지며 물리적 한계에 도달했다. 하드웨어 스펙 경쟁이 사실상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한국이 주도해온 초격차 전략도 위협받고 있다. TCL, 하이센스 등 중국 업체들이 무서운 속도로 기술 간극을 좁히며 저가 공세를 펼치면서 삼성전자는 수익성 악화라는 초유의 위기에 직면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VD·생활가전(DA) 사업부에서 연간 2000억원의 적자를 냈다.

구원투수로 낙점된 이 신임 사장은 구글 출신의 마케팅 전문가다. 2014년 삼성전자 VD 사업부 서비스사업팀장으로 영입된 뒤 2021년 사장단에 합류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2023년 말 상담역으로 물러났으나, 1년 만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는 글로벌마케팅실장을 맡아 브랜드 경쟁력 강화 등 해외 사업 경쟁력 제고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광고 기반 무료 스트리밍 서비스(패스트 채널)인 ‘삼성 TV 플러스’ 사업을 핵심 캐시카우로 안착시키기도 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 사장이 풍부한 사업 경험을 바탕으로 비즈니스 턴어라운드를 주도하고 TV 사업의 미래 성장 동력을 발굴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 ‘플랫폼 기업’으로 사업구조 대전환
이 사장의 복귀는 삼성 TV 사업의 전략을 ‘하드웨어’에서 ‘콘텐츠’와 ‘플랫폼’ 중심으로 완전히 옮기겠다는 승부수로 해석된다. 전 세계 거실에 보급된 수억대의 삼성 스마트 TV를 기기가 아닌 플랫폼으로 활용하겠다는 전략이다.

핵심은 삼성 TV 플러스다. 기기를 팔 때 발생하는 일회성 이익에 의존하는 대신 사용자가 TV를 켜두는 동안 발생하는 광고 수익과 콘텐츠 구독료를 통해 지속적인 수익을 창출하는 구조를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업계 관계자는 “이번 인사는 삼성 TV가 제조업의 정점에서 내려와 서비스 플랫폼 기업으로 진화하겠다는 선언”이라며 “2006년 ‘보르도 TV’ 이후 20년간 이어져 온 하드웨어 성공 방정식이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완전히 재편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번 인사는 지난해 VD 사업부에 대한 그룹 차원의 고강도 경영진단 이후 단행된 인적 쇄신의 결정판이란 분석이 나온다. 기존에 이 사장이 맡고 있던 글로벌마케팅실은 폐지되나 산하의 각 센터는 DX 부문 직속으로 재편된다.

기존 사업부를 이끌던 용석우 사장은 디바이스경험(DX)부문장 보좌역으로 이동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다. 용 사장은 인공지능(AI)과 로봇 등 삼성의 미래 핵심 기술에 대한 자문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다.

김채연/원종환 기자 why2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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