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비 아까워 임단협 뒤 노조 탈퇴…"나만 살자" 연대 사라진 노동운동

입력 2026-05-04 17:54   수정 2026-05-04 18:47


2019년 가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산하 최대 산별노조 A위원장과 독대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문재인 정부는 ‘공공 부문 비정규직 제로’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A위원장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같은 산별노조 소속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조합원의 정규직화를 결사반대하고 있다는 대목에서다. 그는 “연대를 강조하던 예전 노동운동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며 “우리가 잘 설득하는 수밖에…”라고 말끝을 흐렸다.

7년이 지난 2026년. 삼성전자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과급 투쟁은 노동자 연대가 사라진 한국 노동운동의 극적인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삼성그룹 초기업 노조 삼성전자지부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이례적으로 급성장했다. 지난해 9월까지 6000명에 불과하던 조합원이 지난달 7만5000명까으로 불었다. 그 배경엔 반도체 슈퍼호황이 있다. 나눠 먹을 파이가 늘어나자 노조 활동에 관심이 없던 근로자가 대거 가입했다. 반도체(DS) 부문이 중심이 된 노조는 가전·모바일(DX) 부문 조합원 이익엔 관심이 없다. DS 부문만 영업이익의 15%를 상한선 없이 지급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자 DX 부문 조합원이 하루에 1000명씩 노조를 탈퇴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변화를 인구구조학적으로 해석한다. 현재 노조 주축인 3040세대는 외환위기 당시 부모의 평생직장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김희성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연대의 가치를 배우기 전에 개인 생존을 먼저 학습한 세대”라고 했다. 게다가 치열한 스펙 경쟁을 뚫고 입사한 이들에겐 ‘동일노동·동일임금’보다 ‘성과에 따른 차등 보상’이 직관적으로 더 공정하다.

노조를 바라보는 인식도 완전히 달라졌다. 한 대기업의 3선 노조위원장인 B씨는 “요즘 조합원은 조합비를 서비스 비용으로 생각한다”며 “임금 협상 시즌에 노조 가입률이 뛰었다가 임단협이 끝나면 조합비를 내기 싫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고 했다. 노조를 ‘공동체’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이용하는 ‘플랫폼’으로 본다는 뜻이다.

노동조합의 요구는 철저히 개인과 시장의 언어로 재편됐지만 정작 요구를 관철하는 집단주의적 방식은 바뀌지 않았다. 삼성전자 초기업노조는 “(총파업 기간) 만약 회사를 위해 근무하는 자가 있다면 명단을 관리해 추후 조합과의 협의가 필요한 강제 전환배치나 해고에 이들을 우선적으로 안내하겠다”고 했다. 파업 불참자를 신고하면 포상금을 지급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송시영 새로고침노동자협의회 비대위원장은 “기존 강성 노조의 악습만 따라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노동자 연대의 쇠퇴에 따른 노·노 갈등은 앞으로 더 악화할 가능성이 크다. 개정 노동조합법(노란봉투법) 시행으로 원청 노조와 하청 노조가 각자 원청 기업과 교섭하게 되면서 원·하청 노조 간 파이 싸움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조만간 본격화할 법적 정년연장 논의는 노조 내 세대간 갈등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선 노동조합이 개인 이익을 넘어 민주주의라는 공공재를 위해 함께 싸웠다. 사회는 그 ‘연대’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비정규직 등 사회적 약자를 포함한 공공의 이익을 대변하라는 기대가 ‘개정 헌법’의 노동권 규정에 내재해 있다. 하지만 최근 노동운동에선 ‘연대의 언어’ 보다 이익을 분배받겠다는 ‘시장의 언어’만 보인다. 그러면서도 개인에 집단주의를 요구하는 ‘이중성’이 지속되는 한, 노조가 잃는 것은 조합원만이 아니라 노동운동의 미래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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