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회사 영업직으로 일하는 A씨는 어느 날 영업임원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털어놨다. 30년 경력을 가진 시니어급 임원이 입사한 지 6개월밖에 되지 않은 20대 주니어 직원 노트북을 들여다보면서 인공지능(AI) 챗GPT로 제안서 쓰는 법을 배우고 있던 것. A씨는 "선생이 학생이 되는 날이었다"면서 "경험의 방향은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지 않는다"고 했다. 17일 비즈니스 네트워크 서비스 리멤버에 따르면 최근 직장인들 사이에선 AI를 활용해 뽑아낸 업무 결과물의 '속도·품질'이 새로운 성과 기준으로 주목받고 있다. 리멤버 커뮤니티엔 A씨 같은 사례뿐 아니라 신입사원이 AI를 활용해 고질적인 업무 애로사항을 해결하는 활약상이 적지 않게 올라오고 있다.
인적자원개발(HRD) 업무를 맡는 한 직장인은 "직원들 팀빌딩 프로그램 중 점수 계산을 엑셀로 복잡하게 돌리던 게 있는데 대학 갓 졸업한 신입이 '딸깍'만 하면 자동으로 계산되도록 효율화 시켜놨다"며 "팀장이 물개박수를 쳤다"고 했다. 그는 "장표 만드는 것도 왜 이렇게 빠르게 잘하나 했더니 자료 구조화해서 만드는 작업 등을 다 따로따로 프로젝트를 만들어놨다"며 "오히려 (신입에게) 배우고 있다"고 털어놨다.
반론도 있다. 다른 한쪽에선 "모르는 걸 인정하고 배우려는 자세가 진짜 리더의 품격", "상사가 방향을 잘 잡아주면 신입의 기술과 시너지를 낼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목소리가 맞선다.
주니어 직원들의 AI 활용 능력을 둘러싼 이견도 감지된다. '기술 레버리지'인지, '실력 없는 편법'인지 바라보는 시선이 제각각이다. 주니어 직장인들 사이에선 "도구 활용도 실력이다. 밤을 새워 야근하는 게 미덕인 시대가 아니다"라거나 "AI가 낸 결과물을 검토하고 업무에 적용하는 과정 자체가 지적 노동"이란 말이 흘러나온다.
반면 "AI로 낸 결과물만 '복붙'(복사해 붙여넣기)하는 건 위험하다" 또는 "AI가 틀릴 수 있는데 수정할 능력이 없으면 실력이 아니다"라는 지적도 이어지고 있다.
수치상으로는 AI 활용 능력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리멤버가 글로벌 HR 플랫폼 '딜' 의뢰로 지난달 15일부터 2주간 국내 사원~과장급 직장인 1000명을 조사한 결과 82.4%는 AI 역량이 커리어 성장을 위한 핵심 요소라고 답했다. 70%는 "AI 학습을 지속하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다"고 우려했다. 심지어 'AI 역량이 인사 평가·보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응답도 46.1%였다.

이에 관한 시각차도 뚜렷하다. 직장인들은 "단순 노동에서 해방되면 더 빨리 전략적 고민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될 것"이라는 긍정론을 제시했다. "AI를 다루는 법 자체가 새로운 커리어 로드맵으로 떠오를 것"이란 관측을 내놓기도 했다.
HR 업계에선 '수행의 권위' 대신 '검증의 권위'를 찾아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시니어 직장인들은 앞으로 실무 역량이나 도구를 다루는 기술을 넘어 '결과를 가려내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것. 여기서 진짜 리더십이 발휘될 수 있다는 얘기다. AI가 10분 만에 기획안 100개를 뽑아내더라도 사업상 위험요인을 가려내고 내실을 갖춘 최종안을 골라내는 안목은 여전히 경험치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주니어 직장인들은 AI 도구 활용 역량이 언젠가 평준화될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 업계 관계자는 "AI로 업무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던 건 일을 잘해서가 아니라 '도구의 수혜자'였기 때문"이라며 "단순히 AI에 물어보는 수준이 아니라 내 직무 전체를 AI 기반으로 자동화해 효율화하는 나만의 워크플로우를 설계하면서 시니어들의 경험을 체화하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현호 리멤버 AX CIC 대표는 "요즘 업무상황에서 벌어지는 위계 역전 현상은 사실 개인의 능력 차이가 아니라 기업이 AI 전환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의 문제와 연결돼 있다"면서 "AI 시대의 권위는 도구를 잘 다루는 '수행'이 아니라 그 도구를 어디에 배치할지 결정하는 의사결정과 어떤 프로세스를 혁신해 이익으로 연결할지 판단하는 현장의 맥락에서 나온다"고 설명했다.
김대영/홍민성 한경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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