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부터 아이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주변 아이들과 돈 문제로 얽히는 일도 생겨났습니다. 결국 아이가 잠든 밤에… 휴대폰을 확인하고 경악했습니다."
박지연(가명) 씨는 1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비영리단체(NGO) BTF푸른나무재단 본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자녀가 겪은 학교폭력 피해 사실을 털어놨다. 흰 가면을 쓴 박씨는 잠시 말을 멈춘 뒤 입을 열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대화방에는 아이가 폭행당하는 영상은 물론, 가족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성적으로 비하하고 단체로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가면 너머로 박씨의 목소리가 여러 차례 떨렸다. 그는 "더 마음이 무너졌던 건, 우리 아이가 그 안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림자처럼 그 모든 일을 지켜보고만 있었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박씨의 자녀는 괴롭힘으로 현재 학업을 포기한 상태다.
박씨 자녀 사례처럼 최근 학교폭력은 단발성 다툼이 아닌 반복적 괴롭힘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학교폭력이 반복될수록 피해 학생이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고, 주변 학생들도 방관하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학교폭력 반복 피해·가해 경험은 모두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푸른나무재단의 '2026 학교폭력·사이버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반복 피해·가해 비율은 2023년 이후 각각 약 1.4배 증가해 지난해 54.4%, 35.9%를 기록했다. 이번 조사는 지난해 11월 3일부터 12월31일까지 전국 초·중·고교생 8476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더불어 같은 기간 보호자 521명 대상 학부모 인식조사도 실시했다.
반면 피해 후 도움을 요청했다는 응답은 49.4%에 그쳤다. 도움 요청 이후에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답한 비율은 33.0%로 2023년(10.9%)보다 3배가량 늘었다. 학교폭력을 목격한 뒤에도 "가만히 있었다"고 답한 비율 역시 54.6%까지 증가했다.

학교폭력 피해자와 가해자의 '쌍방신고'도 늘었다. 학부모 인식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학교폭력 피해를 신고한 자녀를 둔 학부모 가운데 상대에게 맞신고를 당했다는 응답이 52.6%에 달했다. 학교폭력 쌍방신고는 2023년 40.6%, 2024년 42.3%, 2025년 52.6%로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김미정 BTF푸른나무재단 상담본부장은 "학교폭력 이력이 입시, 취업 등에 중요해지며 '학폭 신고당했으니 나도 신고한다'는 사례가 많아졌다"며 "가해 학생이 피해 학생에게 사과하려 해도 부모님이 소송에서 불리해질 수 있다며 말리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학교폭력 피해 연령대도 낮아지고 있다. 학교폭력 피해를 입은 초등학생은 최근 2년 사이 2.5배 늘어났다. ‘학교폭력 피해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초등학생 비율은 2023년 4.9%에서 2025년 12.5%로 증가했다. 2019년 이후 최고치다. 특히 중학생, 고등학생보다 초등학생의 학교폭력 피해 비율이 높았다. 중학생과 고등학생은 지난해 각각 3.4%와 1.6%로 집계됐다.
김 본부장은 "초등학생들이 몸놀이, 몸장난과 폭력 간 경계가 모호하다"며 "어제까지 같이 몸으로 놀았다가 내일 가해로 보여 신고하는 상황들이 있다"고 분석했다.
온라인 게임을 통한 사이버 폭력도 두드러졌다. 초·중·고교생 전체 응답자들이 신고한 학교폭력 유형 가운데 가장 많은 피해 유형은 언어폭력 23.8%으로 신체폭력이 17.9%, 사이버폭력이 14.5%가 뒤를 이었다. 사이버폭력 중 온라인 게임을 매개로 한 피해는 39.9%로 다수를 차지했다. 이 가운데 95.7%가 온오프라인 중복 피해를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김석민 푸른나무재단 과장은 "과거 사이버폭력은 메신저와 당시 채팅방 중심이었지만 최근 실시간 음성대화 등 게임 공간에서 갈등과 폭력 양상이 두드러진다"고 말했다. 이어 "온라인게임은 경쟁과 승패, 팀 내 책임 전가가 쉽게 일어나는 구조를 갖고 있어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욕설과 성적 괴롭힘 등 게임 중 감정 표현이나 장난으로 축소될 위험이 있다"고 문제 삼았다.
이날 재단은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교육감·지방자치단체장 후보에 대한 정책도 제안했다. △학교폭력 대응 행정 △피해자 정신건강 회복 인프라 확충 △지역사회 갈등 확산 방지 교육 실시 등을 공약에 포함하라는 내용이다. 이종익 재단 상임대표는 "학교는 아이들이 매일 살아가는 공간이고, 지역사회는 아이들 삶의 기반"이라며 "학교폭력 정책은 학생 안전과 학교에 대한 신뢰를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라고 강조했다.
박수빈 한경닷컴 기자 waterbean@hankyung.com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