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슬라 쇼크 뒤 전면에 선 허제홍…엘앤에프 판 다시 짠다

입력 2026-06-05 05:04  

[비즈니스 포커스]



지난해 12월 29일 엘앤에프는 테슬라와 체결했던 3조8347억원 규모 하이니켈 양극재 공급 계약을 973만원 수준으로 정정 공시했다. 계약 종료를 이틀 앞둔 시점이었다.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과 테슬라의 4680 배터리 생산 속도 조절 영향이 겹친 결과였다. 당시 시장 충격은 컸다. 업계에서는 사실상 계약 무산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강했다.

주가는 하루 만에 9% 넘게 빠졌다. 허제홍 대표가 약 5년 만에 대표이사로 복귀하며 오너 책임경영 체제로 방향을 틀던 시점이다. IB 업계에서는 이를 단순한 인사 변화보다 ‘캐즘 이후 생존전략 재편’ 신호로 받아들였다.

연구소 출신 오너, 다시 현장으로


허 대표는 연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USC) 대학원에서 화학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LG필립스LCD 연구소와 엘앤에프 연구소를 거친 연구개발(R&D) 출신 오너 경영인이다. 재계에서는 범GS가 4세로 분류되지만 배터리 업계에서는 “재무보다 공정과 수율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CEO”라는 평가가 더 자주 나온다.

복귀 시점도 상징적이다. 전기차 수요 둔화가 길어지고 테슬라 의존 구조에 대한 시장 우려가 커지던 시기였다. 허 대표는 대표 복귀 이후 사업 구조를 빠르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본 미쓰비시케미컬과 검토하던 음극재 합작 사업을 중단한 것이 대표적이다. 외형 확대보다 양극재 중심 경쟁력 강화에 집중하겠다는 판단에 무게가 실린다. 테슬라 의존 구조와 캐즘 장기화가 동시에 겹치자 전문경영인 체제만으로는 방향 전환 속도를 내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과거 배터리 시장이 공격적 증설 중심이었다면 최근에는 수율과 원가, 에너지밀도 경쟁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어서다. 생산 공정 안정화와 고객사 기술 대응 역량이 다시 중요해졌다는 의미다. 실제 엘앤에프가 최근 집중하는 영역도 기술 격차 유지에 가깝다.

울트라 하이니켈 양극재와 46파이 원통형 배터리용 단결정 제품, 비중국산 LFP 양산 체계 구축 등이 대표적이다.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하이니켈과 LFP를 동시에 가져가겠다는 전략”이라고 본다. 미국 IRA와 FEOC 규제로 공급망 탈중국화가 빨라지면서 엘앤에프 역시 북미 공급망 재편 수혜를 노리고 있다고 분석한다.

지난 3월 정기주총 직후 기자들과 만난 허 대표는 “지난 2년간 글로벌 전기차 수요 둔화 속에서도 성장 기반을 구축해왔다”며 “NCM과 LFP 두 개의 성장엔진을 중심으로 출하량 확대와 주주가치 제고를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하이니켈로 수익성 지키고, LFP로 판 넓힌다


허 대표가 다시 전면에 들고나온 건 결국 하이니켈과 LFP다. 프리미엄 시장에서는 울트라 하이니켈 양극재로 수익성을 방어하고 중저가·ESS 시장에서는 LFP로 저변을 확대하겠다는 구상이다.

하이니켈 분야에서 엘앤에프는 여전히 시장 내 영향력이 남아 있다. NCMA95 기반 울트라 하이니켈 제품 공급 확대와 46파이 원통형 배터리향 신규 제품 출하가 이어지면서 최근 하이니켈 출하량은 3개 분기 연속 증가세를 기록했다. 테슬라 직납 공급망을 구축한 국내 양극재 업체라는 점도 여전히 강점으로 꼽힌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관측도 나온다. 전기차 시장이 성숙 단계로 접어들수록 배터리 업체들은 결국 더 높은 에너지 밀도와 출력이 필요한 신규 시장을 찾아야 한다는 논리다. 휴머노이드 로봇이 대표적이다.

허 대표 역시 올해 정기주총 이후 기자들과 만나 “로봇은 좁은 부피 안에서 고출력을 내야 하므로 결국 하이니켈 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 여러 고객사와 공동 개발을 진행 중이며 일부는 로봇 분야 적용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회사 측이 특정 로봇 프로젝트나 고객사를 공식 확인한 적은 없다.

LFP는 사실상 허 대표 체제의 두 번째 승부수다. 삼성SDI와 체결한 1조6000억원 규모 ESS용 LFP 양극재 공급 계약이 대표 사례다. 핵심은 미국 공급망 재편이다. 최근 미국 정부가 중국산 배터리 소재 규제를 강화하면서 비중국산 LFP 공급망 확보가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미국 시장에서는 “중국을 대체할 공급망을 누가 먼저 확보하느냐”가 배터리 업계의 새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엘앤에프가 공격적으로 LFP 투자에 나선 배경이다. 증권가에서도 비중국 LFP 공급망 구축을 엘앤에프의 핵심 승부처로 본다.

김귀연 대신증권 애널리스트는 최근 보고서에서 “엘앤에프는 이미 확보한 비중국 LFP 양극재 생산능력을 바탕으로 북미 ESS 시장 성장 수혜가 기대된다”며 “FEOC-Free 양극재 추가 수주 가능성 역시 유효하다”고 전망했다.

김 애널리스트는 특히 미국의 공급망 규제 강화 흐름을 주목했다. 중국산 배터리 소재 의존도를 줄이려는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비중국 LFP 양산 체계를 먼저 구축한 업체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고 분석한다.




실적 반등했지만 수익성 회복은 초기 단계


엘앤에프는 올해 1분기 매출 7352억원, 영업이익 1189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흑자전환이다. 영업이익 가운데 약 926억원은 재고 평가손실 환입 효과였다. 일회성 회계 요인을 제외하면 본업 수익성은 아직 회복 초기 단계라는 분석이 나온다.

LFP 신규 투자 부담도 남아 있다. 엘앤에프는 최근 LFP 사업 전담 법인 ‘엘앤에프플러스’를 설립하고 약 2000억원 규모 자금을 투입해 생산능력 확대에 나섰다. 북미 ESS 시장 확대와 비중국 공급망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포석이다.

투자 집행은 이미 시작됐지만 실제 매출과 수익으로 이어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캐즘 장기화 국면에서 투자는 적지 않은 부담이 될 수 있다.

관건은 ‘테슬라 이후’


허 대표 앞에 놓인 또 다른 변수는 지배구조다. 최대주주 새로닉스가 엘앤에프 지분 약 14%를 보유하고 있고 허 대표 개인 지분은 1%대에 머문다. 의결권이 단일 축으로 모이지 않은 구조다. 투자 판단과 사업 속도가 단일 오너 체제 기업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상법 개정으로 이사회 권한과 외부 압력도 함께 강화되는 흐름이다. 행동주의 펀드의 개입 여지가 커지고 있고 외국인 투자자 비중도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 정기주총 과정에서 국민연금이 일부 안건에 반대 의결권을 행사한 것도 이사회 독립성과 수익성에 대한 요구 등 주주들의 달라진 눈높이를 보여준다. 엘앤에프가 시차임기제 도입 등 이사회 개편을 서두른 배경이다.

산업 환경도 단순하지 않다. 중국 CATL과 BYD가 LFP 시장을 선점한 상태다. 북미 ESS 시장은 성장 국면이지만 인증과 규제 변수로 신규 진입 속도는 제한적이다. 비중국 공급사는 구조적으로 부분 침투 단계에 머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허 대표 체제의 핵심 과제는 테슬라 이후에도 유지 가능한 사업 구조를 만드는 데 있다. 단일 고객 의존도를 낮추고 LFP와 하이니켈 투트랙을 안정화하는 작업이다. 동시에 북미 고객 기반을 실제 매출로 전환하는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이 흐름이 자리 잡지 못하면 기존 공급 구조를 대체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허 대표 체제는 방향을 바꾸는 단계는 넘어섰지만 수익 구조 안정화 속도와 북미 고객 확보 범위가 중기 성패를 가르는 기준이 될 전망이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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