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 슈트를 입은 반도체, ‘AI 패권’을 조립하는 K-소부장 [반도체 8대 공정]

입력 2026-06-05 18:28  

[커버스토리 : 반도체 8대 공정 - 8. 패키징]

테스트 공정에서 합격 도장을 받은 웨이퍼는 이제 마지막 관문인 ‘패키징(Packaging)’ 공정으로 진입한다. 우리가 PC를 조립하거나 스마트폰을 쓸 때 눈으로 직접 만지고 확인하는 ‘검은색 사각형 모양의 반도체 칩’이 바로 이 패키징의 결과물이다.

과거의 패키징이 칩을 습기나 충격으로부터 보호하는 ‘철제 상자’에 그쳤다면, 오늘날 AI와 데이터센터 시대의 패키징은 영웅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배트 슈트’로 진화했다. 똑같은 성능의 반도체라도 어떤 패키징 옷을 입히느냐에 따라 전력 소모, 데이터 처리 속도, 크기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패키징은 동그란 웨이퍼판을 각각의 칩(Die) 단위로 잘게 쪼개어 독립시키는 ‘다이싱(Dicing)’ 공정에서 시작된다. 머리카락보다 얇은 칩을 자르다 미세한 금이라도 가면 수개월의 노력이 도루묵이 되기에 정밀한 장비 기술이 필수다. 디스코를 중심으로 한 일본 기업들의 지배력이 유지되는 가운데 HBM 및 첨단 패키징 수요 확대에 따른 레이저 다이싱 기술의 부상이 시장 구도 변화의 핵심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차세대 레이저 다이싱 영역에서 약 70%의 점유율로 두각을 드러낸 한국의 이오테크닉스를 비롯한 국내외 후발 기업들의 기술 경쟁력 확보 여부가 향후 시장점유율 재편의 관전 포인트가 될 전망이다.

안전하게 잘려 나간 낱개의 칩들은 IT 기기의 메인보드와 전기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전용판인 기판 위에 얹어지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무엇을 밑판으로 깔고 칩을 어떤 기술(본딩)로 붙이느냐에 따라 패키징의 갈래가 나뉜다.


첫째는 칩이 하늘을 바라보게 똑바로 얹은 뒤 금속 와이어로 칩과 기판을 연결하는 전통적인 ‘와이어 본딩’ 방식이다. 투박하고 두껍지만 기계적 안정성과 열적 내구성이 강해 자동차용 반도체로 쓰인다. 이 영역에서는 뼈대 역할을 하는 금속판(리드 프레임)의 경우 대만(칭화그룹, SDI), 일본(신코덴키, 히타치 계열), 한국(해성DS) 등 동아시아 3국 업체들이 과점 구조를 형성하고 있으며 중국 업체들의 추격이 가속화되고 있다. 접합 소재인 본딩 와이어 시장에서는 한국의 엠케이전자를 비롯해 독일·일본계 총 4개사가 주도하고 있다.

반대로 칩을 돌려 땅을 바라보게 꽂는 초고속형 ‘플립칩(Flip Chip)’ 방식도 있다. 와이어 선 없이 칩의 전극을 기판에 직접 맞닿게 연결하는 일종의 엘리베이터 구조다. 선이 사라진 만큼 얇고 빠른 반도체를 만들 수 있어 고성능 기기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이 방식은 연결 다리가 없는 대신 기판 바닥에 전기를 통하게 하는 미세한 구슬인 ‘솔더볼’을 총총히 박아야 한다. 이 구슬을 배열했다고 해 ‘BGA 기판(FC-BGA)’이라 부른다. 엔비디아 GPU 같은 AI 연산 장치와 초고속 메모리를 한데 묶어 안전하게 떠받치려면 이 최고급 기판이 필수재로 들어가기 때문에 최근 소부장(소재·부품· 장비) 업계 주가 급등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고사양 FC-BGA 기판 시장에서는 글로벌 시장점유율 70% 이상을 선점한 일본의 이비덴과 신코덴키에 맞서 삼성전기가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며 세계 1위를 노리고 있다. 국내 FC-BGA 기판 업체 중 매출 비중이 가장 높은 기업으로는 대덕전자가 있으며 LG이노텍도 이 기판 중심의 체질 전환이 진행 중이다. 기판 검사 장비사인 기가비스와 기판 바닥의 구슬을 만드는 덕산하이메탈 역시 관련 생태계 기업이다.

진짜 격전지는 ‘본딩’ 부문이다. 반도체를 고층 아파트처럼 위로 높게 쌓아 올리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이 열리면서 칩 자체에 수만 개의 미세한 터널을 수직으로 뚫어 상하단 칩을 전극으로 직접 연결하는 ‘TSV(관통전극)’ 기술이 도입됐다. 현재 HBM 적층의 주력 기술은 열과 압력으로 칩을 다지는 ‘TC 본딩(Thermal Compression)’이다. 이 시장의 글로벌 절대강자는 한미반도체다.

TC 본딩 시장은 현재 HBM4 이후 세대를 겨냥한 하이브리드 본딩(Hybrid Bonding) 기술로의 전환이 가속화되는 분기점에 놓여 있다. 이 신기술의 장비 분야에는 베시(네덜란드), EVG(오스트리아),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미국)가 글로벌 3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으며 CMP 소재·장비 분야에서는 에바라(일본)가 핵심 병목 기업으로 부상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한미반도체가 TC 본더에서 하이브리드 본더로의 기술 전환을 추진 중이며 LG전자 생산기술원이 신규 진입자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이렇게 기판 위에 칩을 안정적으로 붙였다면 마지막으로 열, 습기, 충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화학 수지로 단단하게 채워 밀봉하는 ‘성형 몰딩’을 거친다. 이 과정을 통과해야 비로소 우리가 반도체 하면 떠올리는 검은색 사각형 모양의 완제품 반도체가 완성된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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