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4월 2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역사적 회의가 열렸다. 세계 50개 연합국 대표가 모인, 당시로는 사상 최대 규모의 외교 행사였다. 각국 대표는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참상이 또다시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국제기구 설립을 결의했다. 공식 명칭은 ‘국제기구에 관한 연합국 회의’로 정했다. 회의 마지막 날 111개 조항의 헌장에 서명했고, 그해 10월 24일 유엔이 출범했다.당시 세계 주요 도시가 유엔 본부를 유치하기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벌였으나 미국 뉴욕이 낙점됐다. 미국 석유 재벌 록펠러 가문이 뉴욕 이스트강변 부지를 850만달러에 매입해 기증했다.
올해 설립 81주년을 맞은 유엔이 파산 위기에 직면했다고 한다. 낡은 본부 건물의 개보수 공사는 무기한 보류됐다. 아프리카 평화유지군도 조기 철수를 준비하고 있다. 사무국 인력 3000명을 감축했지만 오는 8월이면 현금이 바닥날 처지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재정 붕괴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탄식했다.
유엔 위기의 표면적 원인은 미국과 중국의 분담금 미납에 있다. 미국은 유엔 예산의 22%를 책임져야 하지만 체납액만 42억8000만달러(약 6조400억원)에 이른다. 분담률 2위(20%)인 중국도 4억5500만달러를 내지 않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유엔 개혁을 명분으로 걸고 있지만 속내는 “말을 듣지 않으면 돈을 끊겠다”는 것이고,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유엔의 방만한 운영과 사업 중복은 오래전부터 개혁의 대상이었다. 분쟁을 막지 못하고, 독재국가의 인권 유린에도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중국의 속내는 다르다. 2021년부터 매년 11월과 12월에 분담금을 내고 있다. 유엔을 1년 내내 재정 불안 상태에 묶어놔 중국 통제 아래 두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유엔 파산 위기는 미국과 중국 두 강대국의 패권 대결에 다자주의가 설 땅을 잃은 국제질서의 단면을 보여준다. 유엔이 멈추면 평화 유지, 난민 보호, 기후 위기 대응, 식량 지원 등 국제 사회의 공동 프로그램도 중단된다. 인류 연대의 상징이던 유엔의 무기력한 모습이 못내 씁쓸하다.
이심기 수석논설위원 sg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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