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오후 3시 서울 낙원동 낙원악기상가 2층. 붉은 조명 아래 빠른 비트의 음악이 울려 퍼졌다. 정장을 갖춰 입은 바텐더들은 얼음을 깨며 버번 위스키를 넣은 칵테일을 만들었다. 미국 버번 브랜드 메이커스마크가 수십 년 된 악기점이 늘어선 낙원상가에서 연 마케팅 행사다.
글로벌 소비재 브랜드의 국내 진출 공식이 바뀌고 있다. 단순히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에 매장을 내는 대신 브랜드 철학과 맞닿은 ‘정체성’을 기준으로 상권을 고르고 있다. 상권이 지닌 고유의 내러티브를 분석, 활용해 시장을 공략하는 ‘핀셋 전략’이다.

1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유니클로는 최근 서울 명동에 대형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고 매장 3층 공간 일부에 명동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실을 마련했다. 사진작가 한영수가 1956년부터 1963년까지 촬영한 ‘서울’ 연작을 전시했다. 명동의 옛 풍경과 당시 패션을 엿볼 수 있다. 명동을 대표하는 점포인 진주회관, 을지다방 등의 간판을 활용한 커스텀 디자인 의류 코너도 있다. 유니클로 관계자는 “명동 특유의 분위기를 매장에도 접목하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명동은 전 세계 소비자가 모이는 핵심 관광 상권이다. 대중적 일상복이 주력 제품인 유니클로로선 ‘라이프웨어’ 철학을 광범위하게 알릴 수 있는 장소인 셈이다.
글로벌 셀럽 킴 카다시안이 설립한 미국 패션 브랜드 스킴스는 국내 첫 팝업 스토어 장소로 서울 성수동을 선택했다. 성수동은 새로운 스타일에 거부감이 없고 변화를 주도하는 젊은 인구가 많은 지역이다.
트렌드에 민감한 아시아권 외국인도 성수동 팝업을 성지 순례하듯 찾는다. ‘힙한 느낌’을 중시하는 스킴스가 정식 매장을 내기 전 아시아 MZ세대 취향을 안전하게 검증하기 위해 성수동에 있는 한섬 플래그십 스토어를 선택했다.
메이커스마크가 낙원상가를 행사 장소로 택한 것도 이곳이 브랜드 정체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었다. 메이커스마크는 모든 병을 빨간 왁스로 수작업 밀봉하는 등 느린 숙성과 장인정신을 브랜드의 핵심 가치로 내세운다. 수십 년간 손으로 악기를 깎고 조율한 장인의 숨결이 남은 낙원상가는 서울의 대표적인 아날로그 공간이다.
메이커스마크는 이전에도 문래동 철공소 골목, 삼각지 화랑거리, 을지로 인쇄골목 등 장인정신이 도드라지는 지역을 마케팅 장소로 활용했다.
‘요가복계 에르메스’로 불리는 알로요가가 지난해 7월 압구정 도산공원에 아시아 첫 플래그십 매장을 연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압구정동은 럭셔리와 취향 소비가 결합한 상권으로 꼽힌다. 알로요가의 전략은 적중했다. 개점 첫 달 매출만 74억원을 올렸다.
글로벌 브랜드가 성수(트렌드 실험), 명동(관광객), 도산공원(럭셔리), 북촌(전통) 등 서울 상권 색상에 맞춰 매장 입지를 택하며 각자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마케팅업계 관계자는 “지금은 메가트렌드가 아니라 개인 취향이 도드라지는 시대”라며 “소비자는 자신이 지향하는 라이프스타일과 동질감을 느끼는 공간에서 지갑을 연다”고 분석했다. 글로벌 브랜드가 특정 장소의 문화를 존중하고 동화하려는 시도를 할 때 소비자가 팬덤을 형성한다는 얘기다.
최근 오프라인 매장은 당장의 제품 판매보다 브랜드 철학을 감각적으로 전달하는 ‘쇼룸’ 역할을 한다. 오프라인 매장이 단순한 수익 창출 창구가 아니라 강력한 마케팅 자산이 됐다.
오프라인 공간이 ‘판매 압박’에서 해방되자 브랜드가 매출 효율성이 좋은 상권 대신 페르소나를 가장 정교하게 보여줄 ‘골목의 서사’를 찾아 과감히 파고들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브랜드들이 상권의 고유한 색깔을 브랜드 철학과 맞춰 입점 전략을 짜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강윤지 기자 yuntor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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