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세상에서 돌아보면 되죠. 그때 환하게 웃으면서 말해요. 그렇게 아파도, 우린 도망가지 않았구나. 살아갔구나.”
연극 ‘반야 아재’는 박이보를 절망 속에서 허우적대는 인물로 그려냈다. 원작 ‘바냐 아저씨’의 바냐에 해당하는 그는 총을 들고 매형 서병후(세레브랴코프) 교수를 쏘겠다고 나서지만, 그 무엇도 제대로 무너뜨리지 못했다. 자신을 옭아맨 환경도 그대로다. 배출구에서 쌀겨가 왈칵 쏟아져 박이보를 뒤덮는 장면은 그의 처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 자리에서 서은희(원작 쏘냐)의 독백이 시작됐다. 박이보가 무너져 있을 때 은희는 그럼에도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무작정 위로하는 말이라기보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세계에서도 견디고 살아내야 한다는 말에 가까웠다. 막연한 희망이나 끝없는 체념보다 관객들에게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국립극단이 지난달 31일까지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선보인 ‘반야 아재’는 러시아 시골을 배경으로 한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1930년대 후반 충청북도 영동군으로 옮겨 심었다. 원작 주인공 ‘바냐’는 ‘박이보’, 조카 ‘쏘냐’는 ‘서은희’, 매형 세레브랴코프는 ‘서병후’ 교수가 됐다.
이번 공연은 결말 독백이 주는 메시지를 극대화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다. 박이보의 서병후 총격 실패 후 무대의 속도는 눈에 띄게 느려졌다. 방금까지 치솟았던 감정은 한순간에 가라앉았고, 이기진(찔레긴)과 마점점(마리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실타래를 감았다. 무대가 일상의 박자로 되돌아가면서 ‘갈 거야’ 등 인물들의 같은 말이 반복됐다.
이 같은 속도 조절은 인물들이 다시 일상에 포획되는 순간을 효과적으로 보여줬다. 그래서 서은희의 마지막 독백은 과거와 다를 바 없고, 앞으로도 달라질 가능성이 높지 않은 그 시간을 묵묵히 통과해 내야 한다는 다짐에 가까웠다. 죽음의 순간까지 버텨야 한다는 끈질긴 생존의 감각을 마지막 독백에 실어 관객에게 건넨 것이다.
오영란(원작 옐레나)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도 무대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 중 하나였다. 교수 서병후의 젊은 아내로 정미소에 내려온 그는 지루한 결혼과 시골 생활 속에서 자기 삶의 가능성을 잃어버린 인물로 그려졌다. 하지만 노래가 시작되는 순간 오영란은 누군가의 아내나 욕망의 대상이라는 자리에서 순식간에 벗어났다. 억눌러 왔던 생의 에너지가 목소리를 통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서은희가 짝사랑하는 의사 안해일(원작 아스트로프)이 그림으로 그린 지도를 하나씩 찢는 장면 역시 인상적이었다. 지도는 그가 붙들고 있던 가능성, 끝내 추구하고 싶었던 목표를 선명하게 보여줬다. 대사로만 하는 설명보다 강하게 다가왔다는 평가다.
아쉬움을 남기는 대목도 있었다. 박이보는 마지막 부분에서 갑작스럽게 존재감이 커지는 인물처럼 느껴졌다. 앞선 장면들에서 서사가 충분히 축적되지 않은 채 막판에 무게가 실리다 보니, 관객 입장에서는 감정이입 대상을 급격하게 바꿔야 했다. 꼭 일제강점기가 시대적 배경이어야 했는지도 온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최한종 기자 onebel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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