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갑옷 파편 위에서 피어난 진짜 연대

입력 2026-06-07 13:16  

지난 5일부터 7일까지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 캐나다 현대무용단 '키드 피봇(Kid Pivot)의 신작 '어셈블리 홀(Assembly Hall)'은 무용과 연극, 신화와 현실의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드는 독특한 무용극이다. 세계적인 안무가 크리스탈 파이트와 극작가 조너선 영이 이끄는 단체의 국내 첫 방한이라는 점에서도 일찍이 화제가 됐다. 무엇보다 작품은 무용 공연임에도 대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몸과 언어를 동등한 서사 도구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현대무용과 차별화된다.



작품의 배경은 비가 샐 정도로 낡은 지역사회 회관이다. 재정난과 회원 감소로 해체 위기에 몰린 '자애와 보호의 기사단'이 마지막 연례총회를 여는 이 공간은 현실의 소박한 풍경이지만, 등장인물들은 어느 순간 중세 기사 서사와 성배 탐색의 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특히 작품 전반에는 중세 유럽의 성배 전설, 그중에서도 상처 입은 왕을 구원하기 위해 성배를 찾아 나선 기사 '파르지팔'의 이야기가 중요한 모티프로 작동한다. 현실의 동호회 회원들은 상상 속 기사로 변모하며 해체 위기에 놓인 공동체의 운명은 황폐해진 왕국을 구원해야 하는 기사들의 탐색담과 겹쳐진다. 장부를 정리하고 회의 안건을 논의하던 인물들이 갑자기 방패를 들고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는 장면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을 드러낸다. "인간은 왜 이미 끝난 것들을 끝내지 못하는가."



질문은 공연 내내 반복되는 '미결 안건(Unfinished Business)'이라는 말 속에 응축돼 있다. 마이크 하울링과 함께 집요하게 되풀이되는 이 표현은 원래 미국 회의 규칙에서 회의 말미에 처리하는 안건을 뜻하지만, 작품 속에서는 점차 다층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표결과 해산 절차를 둘러싼 현실적 압박을 의미하는 동시에 황폐해진 왕국을 구원하기 위해 끝내 완수하지 못한 기사들의 사명을 상징하고 더 나아가 인간이 평생 품고 살아가는 상실과 미련, 외로움의 은유로 확장된다. 극 중 인물들이 해체를 결정하고도 회관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행정적 절차는 종료될 수 있어도 소속감에 대한 갈망과 관계의 흔적은 쉽게 정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제 의식은 음악과 안무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인물들이 낡은 의자와 집기를 옮기며 실랑이를 벌이는 일상적 풍경 사이로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이 갑작스럽게 울려 퍼진다. 이 덕분에 현실과 환상의 간극이 더 벌어진다. 현실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내면에서는 여전히 영웅적 서사를 꿈꾸고 있다는 것이 웅장한 선율을 통해 역설적으로 부각되는 지점이라서다.


특히 공연 중반 등장하는 남성 무용수의 독무는 작품의 정서를 응축한 핵심 장면이다. 갑옷을 입은 기사로 상상되던 인물이 마치 날개가 부러진 새처럼 몸을 뒤틀며 바닥을 기어가는 움직임은 영웅 신화의 붕괴와 인간 존재의 취약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동시에 이는 고전 발레의 상징인 백조의 신체 언어를 현대무용의 거칠고 불안정한 움직임으로 해체하는 시도였다. 무대 위 인물들이 회의석상에서는 결코 말로 드러내지 못했던 외로움과 상처가 이 장면에서 폭발하듯 분출되며 관객은 지금까지의 기묘한 유머가 사실은 깊은 상실감 위에 세워져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작품이 제시하는 해체의 의미는 파멸이나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을 보호하던 세계를 스스로 벗어나는 과정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어셈블리 홀'은 소설 <데미안>의 유명한 문장,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는 구절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극 중 기사단은 구성원들에게 외로운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안전한 껍질이었다. 평소에는 존재감 없는 인물로 그려지는 회원 데이브가 환상 속에서만 위대한 기사이자 지도자로 변모하는 모습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후반부의 만장일치 해산은 공동체의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통과의례일 것이다. 그들은 단체를 포기한 것이지 서로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마지막 장면은 이러한 메시지를 가장 아름답게 시각화한다. 작품은 성배를 찾아 나선 순수한 기사 파르지팔이 상처 입은 왕을 구원하기 위해 던져야 했던 질문("무엇이 당신을 아프게 하는가")을 연대의 언어로 변주하며 끝을 맺는다. 오랫동안 홀로 짊어지고 있던 데이브의 거대한 갑옷은 조각조각 분해되고 남은 회원들은 그 파편들을 하나씩 나눠 들고 무대를 떠난다.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도 함께 나누면 견딜 수 있다는 진실이 이 장면에 담겨 있었다.

'어셈블리 홀'이 해체하는 것은 기사단이라는 조직이 아니라 영웅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오래된 신화다. 작품은 구원이란 거창한 서사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묻고 함께 짐을 나누어 드는 평범한 연대 속에 있다고 말한다. 차가운 갑옷 조각이 무용수들의 맨손 위로 옮겨지는 마지막 순간, 공연은 관객 각자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미결 안건' 역시 누군가와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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