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판결보다 소중한 화해

입력 2026-06-17 18:05   수정 2026-06-18 00:05

법조계에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격언이 하나 있다. “가장 나쁜 화해가 가장 좋은 판결보다 낫다” 초년차 변호사 시절의 나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변호사란 모름지기 서슬 퍼런 법리로 시시비비를 명백히 가려, 의뢰인에게 승소 판결문을 쥐여주는 것이 최고의 역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화해나 조정은 어쩐지 끝까지 싸우지 못하고 중간에 타협하는 차선책처럼 보였다.

그러나 법조계에서 오래 일하며 깨달은 것은 소송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화해다. 주장과 반박이 오가고 증거에 따라 절차대로 나아가는 소송은 차라리 단순하다. 그러나 화해는 다르다. 숫자로 계산되지 않는 인간의 감정이 길을 막아선다. 법률지식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흥미롭게도 법은 가족 간 갈등만큼은 곧바로 판결의 칼을 대지 않는다. 가사소송법은 이혼이나 상속 사건에 대해 재판 전 반드시 조정을 거치게 하는 ‘조정전치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법조차도 누가 옳은지 가르기보다, 서로의 말을 한 번 더 들어보고 당사자의 손으로 직접 마침표를 찍으라고 권하는 셈이다.

소송대리를 하다 보면 사람들은 판결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인정과 이해를 갈망하는 경우가 많다. 형제 간 상속 분쟁을 보면 재산 자체보다 “내가 부모님을 더 오래 모셨다”, “늘 너만 사랑받았다”는 케케묵은 서운함이 쏟아져 나온다. 부부 역시 위자료 액수보다 “내 마음을 한 번도 몰라줬다”는 서글픔이 더 크다. 그래서 화해는 돈이 아니라 인정의 문제다. “네가 틀렸다”고 소리치던 자리에서 “네가 힘들었겠구나”라며 한 걸음 물러서는 일은 판결을 받아내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예전에 조정기일을 마친 뒤 법원 복도에서 마주 선 형제를 본 적이 있다. 오랜 분쟁으로 몇 년째 얼굴조차 보지 않던 이들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형이 무심한 듯 손으로 문을 잡아줬고, 동생은 멈칫하더니 말없이 먼저 탔다. 몇 초에 불과한 장면이었지만, 그날 내가 기억한 것은 조정조서의 문구가 아니라 서로에게 건넨 그 짧은 침묵의 배려였다. 자존심보다 관계를 택하며 반 걸음 물러선 이들은 법적으로 가장 유리한 선택을 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적인 화해를 통해 평안을 선택한 지혜로운 승자였다.

변호사의 역할은 의뢰인의 같은 편이 돼주는 일이다. 그러나 같은 편이 된다는 것이 무조건 싸움을 부추기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승산이 없다고 냉정히 말해야 하고, 때로는 먼저 손을 내밀라고 권해야 한다. 진짜 편은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한 말을 해주는 사람이라는 걸 이 일을 하며 배웠다. 그래서 나는 의뢰인에게 화해가 승패를 떠나 판결보다 더 큰 삶의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종종 설명한다.

소송은 법원이 끝내줄 수 있지만, 화해는 오직 당사자만이 할 수 있다. 변호사 생활을 돌아보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통쾌한 승소 판결문보다, 조용히 악수를 나누고 법정을 나서던 사람의 뒷모습이다. 누가 이겼는지는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 그러나 서로를 이해하려고 애쓴 순간은 오래 남는다. 어쩌면 사람이 평생 배워야 하는 가장 어려운 법은 법전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용서와 화해의 기술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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