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정한 ‘웰니스’의 끝은 어디일까. 모두가 ‘갓생’(god+生·부지런하고 완벽함을 지향하는 삶)을 추구하는 현대사회에서 그것은 오히려 스스로의 본질을 마주하고 자신의 불완전함을 긍정하는 태도에 가깝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용 삶에서 벗어나 진짜 내면의 평화를 찾고 싶다면 300년 전 지어진 일본 교토의 가쓰라리큐로 미학적 여정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정원은 연못을 중심에 두고 산책로를 거니는 ‘지천회유식’ 양식의 정점이다. 걷다 보면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고 속도를 자연에 동기화하는 명상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산책로는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디딤돌(도비이시)로 설계돼 있다. 돌의 간격이 좁을 때는 발밑을 살피며 걸음을 늦추게 하고, 넓고 평평한 돌이 나타나면 그제야 고개를 들어 풍경을 보게 하는 구조다.
여기엔 생애 단 한 번뿐인 순간을 뜻하는 ‘일기일회’의 감각이 흐른다. 뺨을 스치는 바람과 햇살은 오직 지금의 찰나에만 허락된 선물이다. 이 정원은 전체 모습을 한눈에 다 보여주지 않는다. 굽이진 길을 도는 순간 새로운 아름다움을 펼쳐 보인다. 미래를 완벽히 통제하려는 조급함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매 순간 다가오는 의외성과 마주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가쓰라리큐의 미학적 뿌리에는 부족함 속에서 세상의 본질을 발견하는 ‘와비사비’ 정신이 흐른다. 과거 일본인에게 달을 감상하는 것은 자신의 불완전함과 우주의 변화를 동기화하는 의식이었다. 그들은 완벽한 만월보다 구름에 살짝 가리거나 기우는 달에 더 열광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진리를 달을 통해 읽어내며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를 얻은 것이다.
정원에도 달을 바라보는 전용 공간 ‘월견대’가 있다. 이곳에서 누리는 최고의 사치는 바람에 흔들리는 연못 수면 위로 수천 개 보석처럼 부서졌다가 다시 모이는 달빛의 일렁임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이다. 밤길을 밝히는 석등의 높이를 사람 무릎 정도로 낮게 설치한 세심함도 놀랍다. 주인공인 달빛을 방해하지 않고, 호수에 투영된 그림자를 깨뜨리지 않기 위한 의도된 배려다. 어쩌면 인간도 마찬가지다. ‘에고’(자아)라는 석등의 높이를 조금만 낮추면 가려져 있던 삶의 본질이 은은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20세기 서구의 근대 건축가들은 가쓰라리큐를 발견한 뒤 “현대 건축의 미래가 이미 수백 년 전 동양에 있었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브루노 타우트는 “사흘 동안 보면 건축이고, 그 이상 보면 시(詩)가 된다”는 찬사를 건넸다. 르코르뷔지에 역시 ‘다다미’라는 규격화된 격자 단위와 간결한 질서에 큰 충격을 받았다.
가쓰라리큐가 틀에 박힌 현대 건축과 다른 결정적인 이유는 ‘개방성’에 있다. 미닫이문만 열면 방과 정원의 경계가 단숨에 허물어진다. 규칙과 질서라는 단단한 내면을 갖추되 외부의 변화는 거부감 없이 유연하게 수용하는 구조다. 서구 건축가들이 감동한 ‘견고한 중심’과 일본인이 사랑한 ‘불완전한 찰나’가 만나는 곳, 완벽한 균형을 갖춘 공간이 아닐 수 없다. 나만의 질서를 내면에 품고 있다면 외부에서 유입되는 잠깐의 소음 정도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법이다.
매 순간 갓생을 증명하고 인생을 완벽히 통제하려는 강박은 결국 스스로를 소음 가득한 콘크리트 박스 안에 가두는 것과 다름없다. 나의 빈틈과 실패 가능성을 담담히 포용할 때 비로소 마음속에 숨을 쉴 수 있는 여백이 피어난다. 오늘도 머릿속을 꽉 채운 수많은 미래 계획, 끊임없는 타인과의 비교를 잠시 멈춰 보자. 그러면 구름에 가린 달이 어느새 이렇게 속삭일지 모른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변화하는 것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다.”
조지아 조지아컴퍼니 대표(Wave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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