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시대 끝났다”…車 대신 미사일 만드는 유럽

입력 2026-06-21 16:00   수정 2026-06-21 16:35



유럽에서 ‘평화’라는 키워드가 사라지고 있다. 그 자리를 ‘전쟁’과 ‘방산’이 꿰찼다. 지역 사회는 방산에서 일자리를 찾고, 금융 자본은 포트폴리오에서 방산 비중을 대폭 늘리고 있다. 유력 정치인들의 입에선 군산 복합 역량을 강화하겠다는 선언이 잇따른다. ‘전시 경제’가 유럽 실물 경제를 지탱하는 한축이 되고 있다는 평가다.
○장면①: 베를린 에어쇼에 등장한 독일 총리

지난 10일 독일 베를린 에어쇼(ILA 2026) 전시장. '유럽의 맹주' 독일을 이끄는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는 이날 전시장에 등장해 곳곳을 누비며 군 장병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인사를 나눴다. 통상적인 의전 방문에 그치며 잠깐 머물다 떠나던 전임자들과 달리, 그는 이날 4시간 가까이 현장을 지켰다.



그가 가장 오래 관심을 보인 건 현대전의 판도를 바꾼 무인 드론. 메르츠 총리는 에어버스의 스텔스 무인 테스트기 ‘버드 오브 프레이’와 무인기 ‘U740 발키리’, 수직이착륙 정찰 드론 ‘U050 플렉스로터’의 제원을 관계자들에게 꼬치꼬치 캐물었다. 에어버스는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이 공동으로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유럽 대표 항공·방산기업이다. 독일 주요 방산기업의 부스도 빠지지 않고 찾았다. 딜디펜스, 라인메탈 등 기존 대형 방산기업뿐 아니라 스타크디펜스, 헬싱 등 방산 스타트업의 부스까지 일일히 방문해 경영 계획을 하나하나 물으면서 일정이 길어졌다.

전시장 한복판에서 기자회견을 자처한 메르츠 총리는 단상에 오르자마자 “우리는 민간과 제조업, 방산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전략적 생태계로 통합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현지에선 ‘냉전 시대 이후 첫 재무장 선언이자 군산복합 부활의 신호탄’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메르츠 정부가 안보와 경제를 분리하지 않는 'Sicherheitsokonomie(안보경제학)'을 정부의 핵심 전략으로 삼았다는 의미다.

그가 강조한 것은 미국식 모델. 메르츠 총리는 “미국 등 다른 대륙에선 진작에 당연했던 ‘군과 민간 제조사의 결합’을 이제 독일도 본격화한다”며 “전쟁이라는 외부 요인에 등 떠밀려 시작된 변화지만, 훌륭한 민간 기술이 곧 강력한 국가 방위력임을 증명해 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독일 정부는 군산복합 강화와 방산 활성화를 뒷받침하기 위해 재정도 대폭 늘릴 계획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직전인 2021년 GDP 대비 국방비 비중이 1.3% 수준이었던 독일은 현재 수치가 2.4%까지 올라갔다. 오는 2030년까지 3.5%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독일 한 곳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2014년만 해도 나토(NATO) 회원국 중 ‘국방비 지출 목표치(GDP 대비 2%)’를 지킨 국가는 단 3곳 뿐이었지만, 2026년 현재 군대가 없는 아이슬란드 제외한 31개 회원국 전원이 2% 장벽을 돌파했다. 유럽연합(EU) 전체 국방비 지출은 2022년 2400억 유로에서 올해 4300억 유로까지 늘어날 예정인데 이어, 2030년에는 8000억 유로를 돌파할 전망이다.
○장면②: 폭스바겐 미사일 공장 변신



하루 뒤인 지난 11일 독일 북서부 소도시 오스나브뤼크. 한때 ‘폭스바겐의 도시’로 불렸던 공장 정문 앞은 적막했다. 노동자들의 자전거로 붐비던 거치대는 비어 있었고, 부품 물류 트럭의 행렬도 사라졌다. 1㎞ 떨어진 차고장에는 출고되지 못한 ‘T-록 카브리올레’ 수십 대가 먼지를 쓴 채 방치돼 있었다. 외벽의 ‘VW’ 엠블럼만이 이곳이 과거 유럽 제조업의 중심거점이었음을 보여줬다.

이 공장은 내년 6월 일감이 모두 사라진다. 미국과 중국 업체와 경쟁에서 뒤처진 결과다. 독일 자동차 시장 침체에 공장이 사실상 생산을 멈추자 인구 16만 소도시는 주변 상권 몰락과 하청 생태계의 연쇄 붕괴가 나타나고 있었다.

벼랑 끝에서 구원투수로 등판한 것이 ‘방산’이다. 폭스바겐은 이스라엘 방산기업 라파엘과 손잡고 이 공장을 요격 미사일 ‘아이언 돔’의 핵심 부품 생산 기지로 전환하는 계약을 추진 중이다. 현지에선 성공적으로 전환한다면 2300명의 일자리 보존은 물론 지역경제 활성화도 달성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오스나브뤼크 현장은 유럽의 방산 전환이 ‘안보’뿐 아니라 ‘지역경제 부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고육지책임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아버지가 공장의 오랜 숙련공이라는 주민 클라라 씨(25)는 “현재로서는 자동차 기업의 폐쇄를 지역 주민 전체가 반대하고 있다”면서도 “도시의 일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무언가’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게 지금 이곳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라고 말했다.


○장면③: 역대 최대 규모 유럽 방산전시회



방산 시장의 폭발할 조짐을 보이자 가장 바빠진 곳은 기업들이다. 지난 15일 프랑스 파리에서 개막한 유럽 최대 방산전시회 유로사토리는 59년 역사상 최대 규모로 열렸다. 개막 수개월 전부터 전 세계 방산기업들의 부스 신청이 폭주하면서 당초 예정했던 전시 홀외에 추가 홀을 긴급 개방하고 야외 전시장 면적을 대폭 늘려야만 했다.

축구장 24개 면적(약 17만㎡)에 달하는 파리 노르 빌팽트 전시장은 전 세계 60여 개국에서 몰려든 2000여 개 방산기업의 부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공식 초청된 각국 국방부 및 군 대표단만 250개 팀을 웃돌았다. 기업들의 전시 컨셉도 바뀌었다. 과거 추상적인 문구 대신 ‘단기 대량 납기’가 가능하다는 홍보가 잇따랐다. 역내 생산 무기를 찾는 수요가 늘어나는 점을 고려해 ‘100% MADE IN EUROPE’ 등의 문구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참가 기업중 한곳인 유럽 3대 탄약기업 남모의 모르텐 브란트세그 최고경영자(CEO)는 “전쟁 이후 모든게 바뀌고 있다”고 했다. 그는 “텅 빈 창고를 다시 채우고 공급망 구조를 만드는데 엄청난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방위산업은 향후 수십 년간 정신없이 바쁜 슈퍼 사이클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했다.



자본의 대이동도 감지된다. 올해 유로사토리 전시회에는 처음으로 ‘금융 섹션’이 신설됐다. 과거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규제 탓에 방산 투자를 ‘죄악’으로 몰아세우며 자금줄을 끊었던 알리안츠, BNP파리바 등 유럽 대형 금융사들이 이번에는 일제히 전시장을 찾으며 투자 원군으로 나섰다. EU도 직접 나서 자본의 물꼬를 트고 있다. EU는 회원국의 방산 제품 구매를 지원하기 위해 지난해 5월 출범한 ‘세이프(SAFE·Security Action for Europe)’라는 방위 기금을 조성해 지원하고 있다. 총 1500억유로(약 260조원) 규모에 달한다.

샤를 보두앵 유로사토리 주최사 대표는 “국가의 안보가 보장되지 않으면, 그 어떤 ESG도 지킬 수 없다”며 “국방과 자본은 이제 분리될 수 없는 생존의 파트너”라고 말했다.



베를린, 오스나브뤼크, 파리=성상훈 기자 uph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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