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플이 최근 메모리 가격 급등을 탓하며 제품 가격을 15~20% 인상했다. 맥북 프로 14인치 제품 가격으로 따지면 한화로 60만원 정도가 한 번에 뛴 셈이다.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는 지금의 메모리 가격 상승을 “100년에 한 번 있을 대홍수”에 비유했다. 부품값이 너무 빠르게 올라 가격 인상이 불가피했다는 항변이다.

애플의 기습적인 가격 인상은 미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역대급 실적을 공개하는 날 이뤄졌다. 마이크론은 이날 2분기 80%가 넘는 영업이익률을 달성했다고 발표했다. 애플이 가격 인상 책임을 마이크론에 떠넘기는 듯한 묘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마이크론은 즉각 애플의 주장을 받아쳤다. 산제이 메흐로트라 마이크론 CEO는 CNBC 인터뷰에서 “(메모리 불황기이던) 2023년 고객사들이 가격을 이전의 3분의 1로 낮췄다”며 “현재의 공급 부족은 고객사들의 과도한 가격 압박이 누적된 결과”라고 말했다.
특정 고객사를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업계에서는 애플을 겨냥한 발언으로 받아들였다. 마이크론의 불만은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다.
메모리 업계 빙하기였던 2023년 PC와 스마트폰 수요는 급감했다. 코로나 특수가 끝나자 재고가 쌓였고 D램과 낸드 가격은 폭락했다. 메모리 업체들은 팔수록 손해를 보는 구간에 들어갔다.
업계 1위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인 DS부문조차 연간 14조원대 영업손실을 냈다. SK하이닉스도 2023년 영업손실 7조7300억원을 기록했고 마이크론 역시 2023 회계연도 순손실 58억3300만달러(약 7조원)를 기록하며 버텼다. 마이크론의 매출총이익률은 2022년 45.2%에서 2023년 –9.1%로 급락했다.
메모리 기업들은 불황 속에서도 투자를 이어갔다. 반도체 공장은 한 번 투자를 끊으면 몇 년 뒤 공급 공백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DS부문은 2023년 3분기 제시했던 연간 투자 전망치 47조5000억원을 웃도는 48조4000억원을 집행했다.
SK하이닉스도 업황 악화로 투자 규모를 크게 줄였지만 6조원대 투자는 이어갔다. 마이크론 역시 2023 회계연도에 76억달러를 설비투자에 투입했다. 매출이 155억4000만달러까지 쪼그라든 상황에서도 매출의 50%가량을 다시 공장과 장비에 쏟아부었지만 전년(120억6700만달러)보다 36% 줄었다.
시장에서 ‘갑 중의 갑’으로 통하는 애플은 지난 10년간 메모리 반도체를 ‘최저가’에 구매했다. 소비자에게 팔리는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등 완제품 가격은 쉽게 내려가지 않지만 부품 가격이 떨어지면 기업의 마진은 개선된다. 특히 메모리 가격이 폭락하고 공급사들이 적자에 시달리던 시기에는 가격 협상력이 반도체를 사가는 쪽에 있었다. 애플의 2023 회계연도 매출은 3833억달러, 영업이익은 1143억달러, 순이익은 970억달러를 기록했다.

애플과 마이크론의 공방은 과거 완제품 업체가 메모리 기업을 부품사 취급하며 압박하던 갑을 관계가 뒤집히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메모리 반도체 기업이 협상에서 우위를 점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AI 인프라 확대를 위해 빅테크 투자가 늘고 AI 칩 수요와 범용 반도체 수요까지 폭증하면서 가격 결정권이 메모리 공급자에게 주어졌다. AI 시대가 도래하기 전 메모리 기업은 경기 호황과 불황에 따라 2~3년마다 가격이 폭등·폭락했다. 스마트폰과 가전 수요의 영향을 받았고 대량 생산으로 원가를 절감해 시장을 장악하는 전략이 곧 성공방정식이었다.
이 공식이 뒤집힌 건 지난해 말부터다. 2025년 중순까지 바닥을 치던 메모리 반도체 가격은 지난해 10월부터 꿈틀대더니 올해 들어 급격하게 뛰었다. 그동안 공급과잉으로 늘었던 재고가 바닥이 나고 AI발 수요가 몰린 탓이다. DDR4 8Gb 고정거래가격은 1년 새(2025년 6월 2.6달러 → 2026년 6월 21달러) 약 8배 폭등했다. 낸드플래시 역시 2025년 1월부터 2026년 5월까지 17개월 연속 상승세를 그렸다.
애플이 아니어도 줄을 서는 고객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특히 애플이 아이폰에 탑재하기 위해 사가던 모바일용 D램(LPDDR)의 입지가 변했다. 데이터센터용 고성능 메모리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저전력 D램인 LPDDR이 서버용으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애플 대신 LPDDR의 새로운 큰손으로 등극한 기업은 엔비디아다. 하나증권은 지난 5월 보고서 제목을 아예 ‘메기남 등장’으로 달았다. 연애 프로그램에서 새 남성 출연자가 등장하면 기존 관계가 한순간에 흔들리듯 모바일 기기 중심이던 LPDDR 시장에 엔비디아가 들어오자 수급 질서가 바뀌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김록호 하나증권 애널리스트는 2026~2027년 엔비디아가 애플과 삼성전자를 제치고 LPDDR 최대 구매자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엔비디아의 차세대 플랫폼 ‘베라 루빈’을 비롯한 주요 AI 시스템에 LPDDR이 탑재되며 기존 스마트폰 중심이던 수요 축은 데이터센터까지 확대됐다. 김 애널리스트는 2027년 엔비디아가 필요로 하는 LPDDR 물량이 공급능력의 절반 이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분석했다.
AI 반도체 수요는 차량 영역으로도 확산되고 있다. 테슬라의 차세대 AI5 칩에는 12개의 LPDDR이 탑재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향후 로보택시와 휴머노이드 로봇 등 다양한 응용처에서 수요가 확대될 전망이다. 애플이 더 이상 예전처럼 낮은 가격에 원하는 만큼 메모리를 확보하기 어려워졌다는 뜻이다.
두 업체는 중국 군사지원을 했다는 이유로 미국 전쟁부(국방부)가 선정한 블랙리스트다. 미·중 간 긴장이 고조되고 첨단기술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워싱턴 내 국가안보 강경파들의 강한 반발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업계에서는 애플이 중국 메모리 기업과 거래하더라도 수급에 영향을 주기에는 힘들 것이라고 전망한다. 류형근 대신증권 애널리스트는 “페이퍼컴퍼니를 통한 소규모 물량 수출 가능성은 있지만 중국 CXMT는 현재 공급난이 가장 심한 LPDDR5·LPDDR5x 대응력이 떨어진다”며 “미국 입장에선 중국 반도체 자생력을 키우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선단 공정의 중국 내 양산과 기술 유출을 막는 정책을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중국 내부 수요도 변수다. 중국 스마트폰 업체들도 메모리 공급 부족을 겪고 있어 외부 고객사에 충분한 물량을 내주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특히 샤오미는 전년 대비 최대 40% 중반 수준의 출하량 축소 가능성까지 우려하고 있다. 정치적 장벽에 이어 기술 장벽과 내부 수요까지 겹친 만큼 중국 물량이 당장 글로벌 수급에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반도체 가격 상승이 제품 가격과 서비스 비용으로 전가되면 ‘칩플레이션’이 단순한 업황 호재를 넘어 물가와 금리의 변수로 번질 수 있다.
윤여삼 메리츠증권 애널리스트는 “최근 AI 빅테크들의 설비투자(CAPEX) 속도가 벌어들이는 돈의 속도를 추월하면서 쓸 수 있는 여윳돈(잉여현금흐름)이 급격히 줄고 있다”며 “AI 경쟁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빚을 내서 투자해야 하는 단계에 진입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아마존·알파벳·메타·마이크로소프트(MS) 등 4대 하이퍼스케일러의 올해 합산 설비투자는 최대 7000억달러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이들 기업이 벌어들이는 영업현금흐름의 무려 94%를 흡수하는 규모다.
이 때문에 일부 기업은 합산 부채가 현금 보유액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팬데믹 직후 저금리 시절에 빌렸던 사모대출 등 대체투자 상품들의 5년 만기도 대거 돌아오고 있다. 고금리로 돈을 다시 빌려야 하는(차환) 기업들의 비용 부담이 커지고 있다.
최근 인프라 투자 과잉 논란이 일었던 '메타 쇼크' 역시 빅테크가 AI 투자를 멈출 수 있다는 공포를 키웠다. 블룸버그는 최근 메타가 AI 컴퓨팅 파워를 외부에 판매하는 클라우드 사업을 준비 중이라고 보도했다. 이를 두고 메타가 투자를 멈추고 '임대'로 돌아서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며 코스피 지수가 크게 흔들렸다.
오스탄 굴스비 미국 시카고연방준비은행 총재는 “AI 등 기술 발전에 대한 기대가 새로운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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