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0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 이재명 대통령 모두발언이 끝나자 한 국무위원이 발언권을 달라며 손을 들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었다. 정 장관은 전날(29일) 청와대에서 열린 민관 국민보고회에서 ‘3대(반도체·피지컬AI·AI데이터센터) 메가프로젝트’가 공개된 데 대한 소회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정 장관은 “어제는 사회·경제사적으로 역사적인 날”이라며 “40년 전 6·29는 민중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한 날이었고 어제 6·29는 대한민국을 초격차 강국으로 세우겠다는 역사적 선언을 한 날이었다”고 했다.
삼성과 SK는 전날 이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열린 민관 합동 보고회에서 광주 등 서남권을 비롯한 비수도권 지역에 반도체 팹(fab),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신규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두 기업이 밝힌 국내 투자 규모는 총 4755조원에 이른다. 정 장관은 이날 발표를 41년 전인 1987년 노태우 전 대통령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인 6·29 선언과 연결지은 것이다.
정 장관의 발언은 이어졌다. 정 장관은 정부의 광주 등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투자 발표가 “그동안 소외된 지역과 지방에 대한 축복”이라고 했다. 이어 “‘눈 떠보니 선진국’이라는 놀라움에 더해 벼락치듯 다가온 HBM(고대역폭 메모리) 반도체 초강국이라는 현실은 역사의 신(神)이 우리에게 준 축복, 선물”이라고 했다.

정 장관 발언이 알려지자 산업계에서는 “황당하다”는 반응이 나왔다. AI발(發) 메모리 반도체 수요 폭증, 이에 따른 초호황 국면에서의 막대한 이익을 정치인 출신 장관이 ‘신의 축복’으로 일반화했다는 것이다. “불확실성 속에도 꾸준히 투자해 결국 내기 시작한 성과를 ‘운빨’로 평가절하한 것 아니냐”는 격한 반응도 들렸다. 반도체 호황 덕에 초과세수를 확보해 미래세대를 위해 투자할 수 있게 된 건 국가적으로 보면 행운일 수 있지만, 그 원동력은 지금까지 꾸준한 연구개발(R&D) 투자를 통해 미래를 준비한 기업에 있다는 것이다.
이병철 선대회장이 ‘도쿄 선언’을 통해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한 게 1983년이다. “3년 내에 망한다”는 조롱이 쏟아졌지만 연구개발(R&D)과 설비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SK하이닉스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2012년 주변 반대에도 적자기업 하이닉스를 인수했다. 이후 2012년 청주(M12), 2015년 이천(M14), 청주(M15), 2021년 이천(M16) 등 대규모 투자를 이어갔다. “미래 핵심 산업은 반도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초호황은 거져 온 게 아니다”며 “미래에 대비한 선제적 투자의 결과물”이라고 했다. 다른 관계자는 “반도체 치킨게임으로 수천억원씩 적자를 보면서도 견뎌내고 투자해 지금의 이익을 창출할 수 있게 된 것”이라며 “반도체 초강국이 된 게 신의 축복이면, 반도체 호황 덕분에 코스피지수가 9000포인트를 찍은 것도 신의 선물이냐”고 했다.
일각에서는 정 장관이 드러낸 ‘반도체 초호황=신의 축복’ 같은 인식이 반도체 초과이익을 전 국민에 나누자는 주장의 밑바탕이 될까 우려하는 시선도 있다. 막대한 이익을 민간 기업의 경영 성과로 인정하기보다 일종의 운(運)이 작용한 결과로 보는 인식을 경계하는 시선이다. 반도체 기업이 이익을 초과로 거둬들였다며 이에 대한 분배 논리를 강화하는 쪽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어서다.
이는 노동계의 ‘구조적 횡재(windfall)’ 주장과도 통하는 측면이 있다. ‘Windfall’은 말 그대로 ‘바람에 떨어진’ 뜻밖의 횡재를 의미한다. 영국 등 서구 선진국에서는 뜻하지 않은 외부 변화로 막대한 이익을 거둬들였을 때 적용돼왔다. 그러나 뼈를 깎는 준비와 노력의 결과물인 이번 막대한 반도체 이익을 횡재로 봐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국책 연구기관 관계자는 “예상보다 이익이 많이 들어왔다고 해서 그걸 ‘초과된 이익’으로 판단해 나눠주는 방식의 논의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한재영 기자 jyh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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