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세기 영국 산업혁명기, 공장과 탄광에서 하루 열여섯 시간씩 밤낮없이 뼈가 부서지도록 일한 근로자들의 손에 쥐어진 것은 반짝이는 주화가 아니었다. 가혹한 노동의 대가로 이들에게 건네진 것은 상품성이 없어 판매할 수 없던 자사 생산 악성 재고품이나 석탄 덩어리와 같은 현물, 혹은 이를 지급하기로 하는 토큰이나 쿠폰이었다.
19세기 후반 미국의 광산촌이나 철도공사 현장과 같은 고립된 지역의 근로자들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 사용자들은 오직 회사가 운영하는 매점에서만 쓸 수 있는 조잡한 자체 화폐나 쿠폰을 발행해 임금으로 지급하였다. 그럼에도 당장의 생계를 해결하기 위하여 선택의 여지가 없던 근로자들은 임금으로 지급받은 현물을 시장에서 헐값에 매각하여 현금화하면서 큰 폭의 실질 임금 삭감을 감수하거나 시중보다 몇 배씩 가격을 올려 받는 사내 매점에서 열악한 품질의 생필품을 구입하며 번 돈을 고스란히 회사에 반납해야 했다.
이른바 '트럭 시스템(truck system)'에 의하여 임금이 통화가 아닌 다른 형태로 지급되는 순간, 그 임금의 실질 가치를 결정하는 권한은 근로자에서 사용자에게로 넘어가게 된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자본주의 초기의 가혹한 시간을 거치며 영국에서는 1831년 임금은 반드시 영국 합중국의 '통화'로만 지급해야 하며 현물이나 쿠폰으로 지급하는 계약은 무효로 한다는 트럭법을 제정하였고, 1949년 국제노동기구(ILO)는 임금은 법정 통화로만 지급되어야 하며, 어음이나 쿠폰, 상품권 등으로 지급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 임금보호협약(제95호)을 통과시켰다. 이처럼 문명사회의 보편적 약속으로 굳어진 임금 통화지급의 원칙은 일본의 노동기준법을 거쳐 1953년 제정된 대한민국 근로기준법에도 그대로 계수되었다. 이는 과거 행해지던 강제저축이나 현물 지급의 폐단을 없애고 근대적인 노동법 체계를 갖추기 위한 입법자의 결단으로서, 경제적·사회적 종속관계에 있는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근로자가 제공한 신체적·정신적 노동의 대가는 그 어떤 명목으로도 변형되거나 왜곡되지 않고, 즉시 시장에서 유통될 수 있는 국가 법정 통화로 온전하게 지급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 이 유구한 역사적 대원칙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기이한 입법 시도가 있었다. 일부 의원이 대표 발의했던 근로기준법 개정안, 일명 ‘성과급의 지역화폐 지급 법안’으로, 단체협약에 규정이 있거나 근로자의 명시적 동의가 있는 경우 임금의 일부를 지역사랑상품권으로 지급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이 법률안은 최근 역사적인 반도체 사이클과 함께 일부 대기업을 중심으로 대규모 성과급 붐이 일어나는 현실에서 그 보상의 일부를 지역사랑상품권 등 이른바 ‘지역화폐’로 돌려 소상공인을 살리고 지역 균형 발전에 기여하게 하겠다는 취지로 설명되었으나, 진영을 가리지 않은 정치권의 비판과 무엇보다 양대 노총의 격렬한 반발에 밀려 발의한지 사흘을 버티지 못하고 철회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과급의 지역화폐 지급 법안은 무엇이 문제였을까?
우선 근로자의 입장에서 성과급을 지역상품권 등 이른바 지역화폐로 지급하는 것은 명백한 실질임금의 삭감이자 헌법이 보장한 자율적 소비 선택권의 박탈이다. 근로자들이 성과급을 받아 가장 먼저 하고 싶어 하는 일은 대출 원리금을 상환하거나, 주택 임차 비용 내지 구입 비용으로 사용하거나, 각종 상품을 구입하고 생활비를 결제하는 등의 경제활동에 지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역화폐는 사용 지역, 가맹점, 유효기간이 제한된다는 치명적인 삼중 제약이 걸려 있어 이러한 필수적 경제 활동에 전혀 사용할 수 없다. 소비처가 강제로 한정되면서 온라인 최저가 쇼핑이나 타 지역에서의 소비 기회가 박탈되므로, 현금 대비 실질적인 구매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나아가 당장 현금이 급한 근로자들은 적지 않은 수수료를 떼고 지역화폐를 음성적으로 현금으로 바꾸는 소위 ‘상품권 깡’ 시장으로 내몰리게 될 것이라는 것은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
또한 사용자의 관점에서도 성과급을 지역화폐로 지급하는 법안은 환영하기 어렵다. 성과급은 현대 기업, 특히 반도체와 같은 첨단 산업에서 우수한 인재를 유치하고 조직에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이고, 이는 최근 기록적인 매출과 성과급을 기록하고 있는 특정 기업으로의 인재 쏠림 현상을 보더라도 명확하다. 그런데 어느 회사가 성과급의 일부를 지역화폐로 주기로 결정하고 이러한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해당 기업은 이직 시장에서 인재들의 기피 대상으로 전락할 것이고, 더 나아가 현금으로 온전하게 성과를 보상하는 경쟁사로 우수 인력이 대거 이탈하는 경영상 손실을 입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사용자가 성과급을 지역화폐로 지급 시 향후 민·형사상 법적 책임을 부담하게 될 리스크도 무시할 수 없다. 위 법안은 ‘근로자의 명시적 동의나 단체협약이 있는 경우’에만 지역화폐로 성과급을 지급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현실의 노사 관계를 고려하면 향후 근로자의 퇴사 후 혹은 노동조합을 통해 "강요에 의한 형식적 동의였으므로 무효"라고 주장할 경우, 사용자는 통화지급원칙 위반에 따른 임금체불 소송에 휘말리거나, 더 나아가 근로기준법 제109조에 따라 통화지급원칙 위반을 이유로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해당하는 형사처벌의 위험을 부담하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미 대법원이 임금과 관련하여 근로자의 자유로운 의사에 기한 동의 여부를 극히 엄격하고 좁게 심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사용자가 쉬이 감내하기 어려운 법적 불확실성이 될 수 있다.
다행히 이 성과급의 지역화폐 지급 법안은 여론의 호된 매질 앞에 발의된 지 사흘 만에 철회되며 일단 해프닝으로 멈추어 섰지만, 입법 만능주의에 빠진 정치권에 던지는 시사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지역경제가 침체하고 대기업과 지역 중소 상권 사이의 격차가 벌어지는 현실은 외면하기 어려운 문제이고, 발의자가 내세운 지역경제 활성화와 소상공인 지원이라는 정책 목표가 완전히 공허하다고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선한 의도가 언제나 선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하여 임금 지급방식을 법으로 제한하겠다는 이 법안은 노동법이 지난 수백 년간 투쟁을 통해 달성한 자신의 노동의 대가를 어디에, 어떻게 쓸지를 스스로 결정할 근로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이며, 정책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근로자의 유일한 생계 수단인 ‘임금’을 행정 편의의 도구로 삼겠다는 본말전도적 발상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임금 통화 지급의 법칙이 도입된 역사적 배경과 입법 취지를 생각하며, 좋은 목표는 그에 어울리는 수단을 통하여 달성되기를 기원해본다.
송우용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