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국내 벤처시장의 주인공은 인공지능(AI)과 로봇 스타트업이다. 아직 시제품도 나오지 않았는데 시드 투자부터 수백억원을 모은 기업이 적지 않다. 올해 상반기 컨피그인텔리전스는 400억원, 아스테로모프는 420억원을 조달했다. 시리즈A에서부터 1550억원을 모은 홀리데이로보틱스는 7000억원의 몸값을 인정받았다. 어떤 기준으로 기업을 선별하는지를 벤처캐피털(VC) 심사역에게 물어봤다.공통적인 대답은 ‘창업자’였다. 회사를 설립해 엑시트(자금 회수)한 경험이 있거나 빅테크에서 일하며 연구개발 경험을 쌓은 경력자가 세운 기업을 높게 평가한다는 설명이었다. AI와 로봇 같은 딥테크 기업은 초기 투자 비용이 만만찮다. 제대로 된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할 때까지 소요되는 기간도 길다. 검증된 창업자가 설립한 기업에 투자하면 외부 인재 수혈과 자금 조달 등이 용이하다. 사업화 성공 가능성도 자연스레 올라간다.
하지만 이런 흐름을 우려스럽게 보는 시각도 있다. VC가 딥테크 스타트업의 기술을 검증할 능력이 부족하다 보니 창업자의 이력만 쳐다보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적잖다. 물론 VC 입장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AI와 로봇 같은 첨단 분야의 미래 기술 가치를 정확하게 따지는 건 경험 많은 심사역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수익을 내야 하는 투자회사가 성공 확률이 높은 곳에 자금을 배분하는 것 역시 합리적인 선택으로 봐야 한다. 딥테크처럼 실패 비용이 큰 분야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해도 최근 VC 행보는 도가 지나치다. 올해 상반기 말 기준 시드와 시리즈A 등 초기 라운드 투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AI·로봇 분야에 몰렸다. 시드 투자로만 한정하면 투자금의 90% 이상이 AI·로봇 분야에 집중됐다. VC가 위험을 감내하는 ‘모험자본’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이들이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창업자와 기술을 발굴하는 역할을 포기하면 미래의 가능성은 사라진다.
경력직 창업자의 투자금 독식 현상을 막으려면 정부의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 투자 생태계를 더 촘촘하게 설계해야 초기 창업자가 숨을 쉴 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 SBIR(중소기업 혁신 연구)과 STTR(중소기업 기술 이전)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초보 창업자에게 연구개발 자금을 지원하는 미국 사례를 눈여겨볼 만하다.
검증된 창업자에게 벤처 자금이 몰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합리성이 새로운 창업자의 진입장벽을 높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투자가 검증된 이력만 좇기 시작한다면, 벤처 생태계가 ‘경력직만 선호하는 노동시장’을 닮아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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