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월 9일(현지 시간) 저녁 미국 뉴욕 맨해튼의 심장부에 위치한 JP모간체이스 글로벌 본사 신사옥 최상층에 초대형 태극기가 빛났다. 이튿날 SK하이닉스의 미국 주식예탁증서(ADR) 상장을 기념하기 위한 랜드마크 조명 이벤트였다. 다음 날 오전 11시를 조금 넘은 시점부터 SK하이닉스 ADR이 거래되기 시작했다. 공모가는 149달러였지만 금세 거래 가격은 170달러를 넘겼다. 이날 ADR IPO 행사를 마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특파원단과 만나 인공지능(AI) 시대 메모리 반도체 산업의 핵심 과제로 ‘속도’를 꼽으며 공급 확대를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AI 수요 증가 속도가 공급 확대 속도를 크게 앞지르는 상황이 이어질 경우 메모리 가격 급등으로 일반 반도체 시장까지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내놨다. 월가 일각에서 메모리 반도체 성장둔화에 대한 우려가 나오는 가운데 최 회장의 발언은 AI 발전에 따른 반도체 성장 파워를 재확인시키는 것이었다.
○“공급 확대 빨리해야”
SK하이닉스 ADR은 이날 168.49달러로 마감하며 공모가인 149달러 대비 13.08% 급등한 가격으로 성공적인 첫날 거래를 마쳤다. 이번 1억7790만 주의 ADR 발행을 통해 총 265억달러의 자금을 확보했다. 이는 2014년 상장한 알리바바(250억달러)의 기록을 뛰어넘는 미국 증시 외국 기업 IPO 사상 최대 규모다.
최 회장은 이 자리에서 공급 확대의 시급성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공급을 빨리 늘리지 못하면 반도체 시장 자체가 위축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걱정”이라며 “반도체 시장은 AI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 소비자용 시장도 있는데 메모리가 너무 비싸지면 시장이 쪼그라들 수 있다. 가능한 한 빨리 공급을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AI 시대 메모리 산업의 사이클에 대해서는 과거와는 다른 구조라고 진단했다. 그는 “구조적인 변화는 이미 일어났다. 과거와 똑같은 사이클은 아니다”라며 “지금은 수요가 늘어나는 속도가 공급을 늘리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AI에서 토큰 사용량이 늘어나면 KV 캐시도 함께 늘어나고 결국 저장해야 하는 메모리도 계속 증가한다”며 “AI는 아직 네다섯 살짜리 아이와 같다. AGI까지 가려면 계속 학습해야 하고 애플리케이션도 계속 늘어난다. 그 과정에서 메모리 수요는 지속해서 증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KV 캐시는 거대언어모델(LLM)이 답변을 만들어낼 때 앞서 계산한 결과값을 메모리에 임시로 저장해두고 다음 단어를 예측할 때 재사용하는 핵심 최적화 기술이다. AI가 단어를 하나씩 이어 붙여 문장을 완성할 때마다 매번 처음부터 다시 연산하는 수고를 덜어주는 역할을 한다.
○메모리 수요 감소하지 않을 것
최 회장은 HBM 사용량을 줄이는 기술이 등장하더라도 전체 메모리 수요는 감소하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HBM을 덜 쓰는 기술이나 압축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저장해야 하는 메모리 총량이 줄어들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최근 미국 고객들과의 논의에서도 가장 큰 화두는 공급 확대였다고 소개했다. 그는 “뉴욕에 오기 전 캘리포니아에서 고객들을 만났는데 모두 ‘메모리를 얼마나 더 받을 수 있느냐’, ‘생산량을 어떻게 늘릴 것이냐’는 질문만 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모든 고객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메모리를 요구하고 있다”며 “하지만 돈만 있다고 공장을 지으면 바로 생산이 되는 산업이 아니다. 최대한 속도를 높여 공급을 늘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실제 반도체 산업은 자본력을 앞세워 대규모 설비 투자를 단행하더라도 실제 시장에 제품이 쏟아져 나오기까지는 넘어야 할 물리적·기술적 장벽이 산적해 있다.
가장 큰 난관은 반도체 공장 구축에 드는 절대적인 시간이다. 초미세 공정을 다루는 반도체 팹은 일반 제조 공장과 달리 미세한 먼지와 진동을 완벽히 통제해야 하는 거대한 클린룸과 특수 인프라가 필수적이다. 부지 선정부터 환경 평가, 건설, 장비 반입 및 설치까지 아무리 속도를 내도 최소 3년에서 5년 이상의 긴 시간이 필요하다.
공장을 다 지어도 첨단 장비 품귀 현상이 발목을 잡는다. HBM 등 차세대 메모리 생산에 필수적인 실리콘관통전극(TSV) 공정장비, 열압착(TC) 본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등은 소수의 글로벌 장비사들이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고도의 정밀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장비 생산 능력 자체가 제한적이어서 현재 주문을 넣어도 납품받기까지 1~2년 이상을 대기해야 하는 ‘장비 리드타임’이 발생하고 있다.
힘겹게 장비를 들여와 라인을 가동하더라도 ‘수율’이라는 가장 까다로운 장벽이 기다리고 있다. D램을 여러 층으로 얇게 깎아 쌓아 올리고 수만 개의 미세 구멍을 뚫어 연결하는 HBM 공정은 그야말로 초고난도의 기술력을 요구한다. 미세한 열 변형이나 층간 어긋남만 발생해도 칩 전체를 폐기해야 한다. 완벽한 공정 레시피를 찾아내고 상업성 있는 수율(통상 60~70% 이상)을 확보하는 데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축적된 엔지니어링 노하우가 필수적이다.
○AI 메모리 최대 수혜 이어갈 것
이 같은 점들을 배경으로 월가에선 SK하이닉스가 압도적인 HBM 시장점유율과 가파른 실적 성장세를 바탕으로 향후 수년간 AI 메모리 시장의 최대 수혜를 이어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투자 분석 플랫폼 시킹알파는 7월 14일(현지 시간) “SK하이닉스는 HBM 시장점유율과 견조한 펀더멘털을 바탕으로 장기 성장성이 가장 뛰어난 종목”이라며 ‘강력 매수’ 의견을 제시했다. 보고서는 현재 SK하이닉스가 글로벌 HBM 시장의 약 56%를 점유하고 있어 약 23% 수준인 마이크론을 크게 앞서고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시장점유율 우위가 수익성 개선으로 직결된다고 분석했다. 생산 규모가 커질수록 단위당 고정비 부담이 감소해 매출원가가 낮아지고 이는 높은 매출총이익률로 이어진다는 설명이다. 또한 기술 우위를 바탕으로 생산 효율성이 높아지면 변동비 부담도 줄어 공헌이익이 확대되고 결국 순이익과 주당순이익(EPS), 기업가치가 모두 개선되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된다고 진단했다.
실적도 빠르게 개선되고 있다. SK하이닉스의 영업활동 현금흐름은 최근 12개월 동안 약 61억달러에서 175억달러로 185% 증가했다. 보고서는 AI 반도체 수요가 최소 2027년까지 둔화할 조짐은 보이지 않으며 회사 경영진을 비롯한 업계에서는 HBM 공급 부족이 2030년까지 이어질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향후 3~4년간 안정적인 성장 국면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AI 메모리 랠리 정점 논란
일각에선 AI 메모리 랠리가 정점에 가까워질 가능성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우려도 나온다. SK하이닉스 주가 역시 마이크론과 마찬가지로 단기간에 큰 폭으로 상승한 만큼 2028년 실적 전망치가 추가 상향되지 않을 경우 2029년 이후 성장 둔화 우려가 부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적이 급격히 악화하지는 않겠지만 성장률이 정상화 국면에 진입하면 투자자들의 관심이 다른 성장주로 이동할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했다.
AI 투자 성과 지연도 변수다. 토르스텐 슬록 아폴로 글로벌 매니지먼트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인공지능(AI) 투자 성과가 시장 기대보다 늦게 나타날 경우 미국 경제와 금융시장 전반이 예상보다 큰 충격을 받을 수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AI 투자 성과가 예상보다 늦어질 경우 세 가지 파급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전망했다. 우선 기업들의 현금흐름과 실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자유 현금흐름 증가 시점은 늦어지는 반면 이미 계획된 대규모 설비투자(CAPEX)와 감가상각비용은 예정대로 발생하면서 이익률이 압박받고 실적 전망도 하향 조정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또 매그니피센트7의 주가 조정이 시장 전체로 확산할 가능성도 제기했다. 현재 주가는 AI 투자 성과가 빠르게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를 상당 부분 반영하고 있는 만큼 기대가 후퇴할 경우 밸류에이션 재조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재무건전성 악화도 우려 요인으로 꼽았다. 내부 현금만으로 AI 투자 자금을 충당하지 못할 경우 하이퍼스케일러들은 회사채 발행 등 차입에 더욱 의존하게 되고 이에 따라 부채비율이 상승하는 것은 물론 실적 부진이 이어질 경우 신용등급 강등 위험도 커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는 최근 HBM과 DDR5 등 고성능 메모리 수요를 견인해온 핵심 동력이다. 만약 하이퍼스케일러들이 AI 투자 회수 기간이 길어졌다고 판단해 데이터센터 투자 속도를 늦추거나 설비투자 계획을 축소할 경우 HBM 주문 증가세도 둔화할 가능성이 있다.
업계에서는 단기적인 투자 속도 조절과 중장기 수요는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는 시각도 있다. AI 모델의 성능 경쟁이 계속되는 한 고성능 메모리에 대한 구조적 수요 자체는 유지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AI 투자 수익성에 대한 의문이 커질 경우 메모리 업체들의 실적과 밸류에이션은 단기적으로 변동성이 확대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뉴욕=박신영 한국경제 특파원 nyus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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