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아비뇽] 한강 "배우 몸을 돌고 나온 문장들…땀 흘리며 마주한 겨울은 특별했죠"

입력 2026-07-16 07:00   수정 2026-07-16 09:04

[여기는 아비뇽] 한강 "배우 몸을 돌고 나온 문장들…땀 흘리며 마주한 겨울은 특별했죠"



"너무 더운 계절에 아주 추운 겨울 이야기를 보며 땀을 흘려야 하지만, 돌로 된 성벽이 주는 밤의 힘과 어둠 속 약간의 불빛이 있어 그 겨울 느낌이 더 특별하게 다가왔습니다."

남프랑스의 이글거리는 여름 태양 아래, 소설가 한강의 문장이 시린 겨울의 입김이 되어 피어올랐다. 최고기온이 35도에 달하는 뜨거운 아비뇽의 여름밤이었지만, 그의 고요한 언어는 관객들의 마음에 하얀 눈꽃을 뿌리고 있었다. 올해 아비뇽 연극제가 사상 처음으로 초청 언어로 '한국어'를 선정한 가운데, 한강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1부를 바탕으로 한 낭독 공연 '새(Oiseau)'가 축제의 상징인 교황청 명예극장에서 베일을 벗었다.

프랑스 연출가 줄리 델리케가 선보인 '새'는 소설 전체의 서사를 압축하기보다 문장 하나하나가 품은 부드럽고 섬세한 감각을 무대 위로 길어 올리는 작업이다. 바람에 흩날리는 눈송이와 작은 새의 깃털, 일렁이는 촛불과 그림자 같은 이미지를 배우의 목소리와 몸짓, 그리고 침묵을 통해 입체적으로 확장한다. 한국 배우 이혜영과 프랑스 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나란히 각자의 모국어로 텍스트를 교차해 읽어 내려가는 동안, 아비뇽의 오래된 돌성벽은 어느새 소설 속 제주의 시린 겨울 풍경으로 변모한다.


15일(현지시간) 공연을 앞두고 만난 한강 작가는 극화가 아닌 '낭독'이라는 형식 자체가 지닌 낯설면서도 아름다운 힘에 대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제 소설을 극화하기보다 낭독한다는 점이 굉장히 새롭게 느껴졌다"며 "두 배우가 나란히 서서 텍스트를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를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됐다"고 참여를 결심한 이유를 설명했다.

어둠이 내린 교황청 성벽 아래에서 마주한 무대는 작가 자신에게도 깊은 울림을 남겼다. 한 작가는 "어제 저녁 최종 리허설을 봤는데, 제가 쓴 문장들이 배우들의 몸을 거쳐 공간으로 퍼져나가는 모습을 처음 경험했다"며 "참 새롭고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소리 내지 않고 글을 읽는 묵독의 순간에도 머릿속에서는 저마다의 음악이 만들어지지만, 배우의 해석과 목소리를 거친 언어는 또 다른 차원의 음악적 경험을 선사한다고 설명했다.

"언어라는 게 원래 음악적인 힘이 있잖아요. 독자가 상상한 음악적 리듬과 배우가 해석해 자신의 몸을 통과시켜 내보내는 음악적 요소가 겹쳐지면서 생기는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 아름다운 숨결은 국경을 넘어 해외 독자들에게도 고스란히 닿는다. 광주와 제주라는 한국 현대사의 구체적이고 무거운 비극을 다루면서도 세계적인 공감을 얻는 이유에 대해 그는 역설적으로 '가장 가벼운 것들을 통한 접근'을 꼽았다.

"사건은 무겁고 비극적이지만, 소설을 쓸 때는 굉장히 부드럽고 가벼운 것들을 통해 그 사건에 가까이 가고 싶었습니다. 눈송이와 새의 깃털, 흔들리는 촛불의 불꽃, 벽에 일렁이는 그림자 같은 것들이 모두 가볍고 부드러운 것들이잖아요. 그런 감각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싶었어요."

역사적 지식의 유무는 이 여정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주인공 경하의 발걸음을 묵묵히 따라가다 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역사 속 숨은 얼굴들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 작가는 "그 사건은 한국만의 특수한 사건이라기보다 인류가 오랜 역사 속에서 반복해온 비극"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이해의 문턱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쏟아진 관심에 대해서는 "솔직히 부담스러웠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매년 새로운 수상자가 나오니 점차 관심도 줄어들고 마음도 가벼워지고 있다"며 "특별히 삶이 달라진 건 없고, 그저 예전처럼 똑같이 살고 있다"고 웃었다.


그는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사회적 분열의 시대에 문학이 해야 할 역할에 대해서도 묵직한 사유를 덧붙였다. 혐오를 '문제'로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고 했다.

"혐오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문제적인 것이라는 공감대가 있다면 거기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이 혐오의 시대에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하나의 충격이 또 다른 충격에 덮여 그냥 흘러가 버려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사건이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다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나아갈지 고민해야 하는 시점입니다."

그에게 언어는 세계와 만나고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가장 근원적인 존재 방식이다.

"언어를 통해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을 하고, 고백하고, 진실을 털어놓기도 하잖아요. 언어로 할 수 있는 수많은 일 가운데 좋은 것들을 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 많은 가능성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문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설지연/허세민 기자 sj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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