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뇽 교황청 무대 선 이혜영 "韓 관객 실망시키지 않으려 했어요"

입력 2026-07-17 07:23  

아비뇽 교황청 무대 선 이혜영 "韓 관객 실망시키지 않으려 했어요"

"한국어로 낭독하는 거잖아요. 한국 관객을 위해 무대에 선다고 생각했어요. 관객 2000명 중 한국인이 단 몇 명뿐이어도 그분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공연을 하겠다고요."



17일(현지시간) 프랑스 아비뇽 한 극장에서 기자들과 만난 배우 이혜영은 전날 아비뇽 교황청에서 초연한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의 낭독극 '새'(Oiseau)에 임하는 마음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세계적인 연극제 '아비뇽페스티벌'에 공식 초청된 이혜영은 페스티벌의 상징적 공간인 교황청 명예의 뜰에 오른 첫 한국 배우라는 기록을 남겼다.

"올해 아비뇽페스티벌의 초청언어가 한국어라고 해서 '무조건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한국 대표 배우란 책임감을 가지고 기꺼이 하겠다고 했죠."

'새'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 1부를 한국어와 프랑스어 두 가지 언어로 교차 발화하는 형식의 낭독극이었다. 이혜영은 제주 4·3사건의 피해 가족인 '인선' 역을, 프랑스 배우 이자벨 위페르는 인선의 부탁으로 한겨울 제주도로 향하는 친구 '경하' 역을 맡았다. 두 배우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 '여행자의 필요'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다.

전날 명예의 뜰에 모인 세계 각국의 관객은 2000여명이 한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숨 막히는 집중력을 보여줬다. "이곳 관객들은 예술에 대한 경외심이 있어요. 더위와 싸우면서도 예술을 사랑하는 이 사람들이 바로 예술가예요. 내가 잘해서, 우리 공연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이 관객들이 공연의 수준을 만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 무대에 선 것 자체가 영광이에요."

이혜영의 육성은 건너편 교황청 돌벽을 두드리듯 단단하게 울려 퍼졌다. 나직한 목소리로 자장가를 부를 땐 아비뇽 성벽을 타고 고향의 포근한 공기가 불어왔다. "처음에는 낭독이라고 해서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책만 읽으면 되는 줄 알았어요. 정말 쉽게 생각했죠. 그런데 줄리 델리케 연출이 저한테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살아있게 말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인선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목수니까 목수 옷을 입고요. 예상과 완전히 다른 숙제가 된 거죠." (웃음)



이혜영은 지난 5월 말 싱가포르에서 연극 '헤다 가블러'를 마치자 마자 맹연습에 돌입했다. 소설을 대본 삼아 매일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하며 낭독을 반복했다. "이번에 안경까지 새로 맞췄어요. 제가 시력이 안 좋거든요. 무대에 대사를 볼 수 있는 프롬프터가 있지만 어디에 위치할지 몰랐기 때문에 준비가 많이 필요했어요."

한국어 낭독이지만 이참에 프랑스어까지 배웠다. "아비뇽페스티벌을 위해 외국어 공부 애플리케이션으로 프랑스어를 1년간 공부했어요. 이자벨의 프랑스어가 끝나자마자 제가 치고 들어가야 하니까 프랑스어를 읽을 줄 아는 게 도움 됐어요."



연기 생활 45년 대배우인 이혜영은 "여기서 신인 배우가 된 기분을 느꼈다"고 웃었다. "집 떠나 24시간이나 걸려 아비뇽에 왔는데, 저보다 경험 많은 이자벨과 함께하면서 신인 여배우가 된 것 같았어요. 제 목소리로 전해지는 한국어가 외국인에게 '음악'으로 들릴지, 아니면 '소음'으로 들릴지 알아보고 싶었는데, 그걸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도 했고요."

이혜영은 16일(현지시간) 교황청에서 2회차 공연을 마치고 귀국한다. 오는 10월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에선 같은 작품으로 한국 관객을 만난다. 낭독극 말미에 등장한 한강 작가는 SPAF 무대엔 오르지 않을 예정이다.

아비뇽=허세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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