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그토록 바라던 코펜하겐을 다녀왔다. 조명을 업으로 삼은 내게 이번 여행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빛이 있었다. 그건 미술관의 빛도, 건축의 빛도 아니었다. 바로 코펜하겐의 파란 하늘빛이었다.
유럽에서 찍은 사진은 왜 그렇게 멋져 보일까.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이라면 한 번쯤 품어봤을 질문이다. 오래된 건물 때문이기도 하고, 낯선 거리의 사람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그 답의 절반 이상이 하늘에 있다고 생각한다. 정확히는, 하늘의 '파랑'에. 그리고 코펜하겐의 파랑에는 다른 도시들과 구별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깊이, 또 하나는 길이다.


고도가 낮다는 것은 빛이 대기를 더 길게 통과한다는 뜻이다. 통과하는 길이가 길어질수록 산란된 푸른빛은 겹겹이 쌓이고, 하늘은 그 파랑에 더 깊게 물든다. 여기에 북유럽의 여름 대기가 힘을 보탠다. 서늘하고 맑은 공기는, 레일리 산란이 만든 파랑을 흐리지 않고 그대로 남겨둔다.
이 파랑을 연색 조도계로 확인해 보았다. (이걸 하고 싶어 여행지에 굳이 고가의 장비를 챙겨갔다.) 건물 그늘에서 직접 잰 색온도가 8400K(캘빈)을 가뿐히 넘었다. 우리가 흔히 푸른 백색광이라고 하는 주광색이 6500K 정도이니, 8400K은 눈에 띌 정도로 푸른 색이다. 한국에선 아주 청명한 일부 가을 하늘에나 느낄 수 있는 정도의 색이 이곳에선 쉽게 볼 수 있는 색이다.


또한 낮은 직사광 때문에 건물에 가려진 너른 그늘의 공간은 온전히 하늘의 몫이 되어 산란된 푸른빛이 가득 고인다. 그늘에서 몇 걸음 벗어나면 이번에는 반대의 빛을 만난다. 푸른빛을 대기에 넘겨주고 연한 노란빛이 된 직사광과의 대비가, 세상의 모든 색을 한층 또렷하고 따뜻하게 살려낸다. 깊고 푸른 그늘과 선명한 양지가 몇 걸음 간격으로 교차하는 거리. 이 도시의 낮이 유난히 입체적으로 보이는 이유이자, 코펜하겐의 빛이 부리는 첫 번째 마법이다.
문득 서울의 여름 하늘이 떠올랐다. 우리의 여름 공기는 습도가 높아 수증기와 에어로졸 입자가 많고, 이 굵은 입자들은 파장을 가리지 않고 빛을 흩뿌린다. 그래서 한여름 서울의 하늘은 파랑보다 옅은 하늘색 또는 옅은 회색에 가까워진다. 같은 그늘인데도 코펜하겐의 그늘이 더 깨끗하고 차갑게 느껴졌던 이유다.

첫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숙소 창가에 한참을 서 있었다. 해는 지평선을 향해 곧장 떨어지는 대신 한없이 비스듬한 각도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짙푸른 초저녁의 하늘이 한 시간 넘게 이어졌다. 서울의 여름 저녁이 낮에서 밤으로 빠르게 전환된다면, 이곳의 저녁은 낮이 밤으로 서서히 번져가고 있었다. 서울에서라면 삼십 분이면 끝났을 변화가 이곳에서는 두세 시간에 걸쳐 일어나는 느낌이었다.

이 느린 저녁의 정체도 역시 위도다. 낮게 도는 태양은 질 때에도 수평선 아래로 수직에 가깝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낮은 각도로 비스듬히 미끄러져 내려간다. 같은 '일몰'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두 도시에서 해가 사라지는 방식은 기하학적으로 서로 다른 사건인 셈이다.
푸른빛을 대기에 빼앗긴 태양이 오렌지색으로 물들며 세상을 꿈처럼 만드는 시간을 골든 아워(Golden Hour)라 부른다면, 해가 진 뒤 태양은 숨고 하늘만 깊고 푸른 기운으로 남는 시간은 블루 아워(Blue Hour)라고 한다. 야경의 사진이 가장 잘 나오는 시간이기도 하다. 완전히 캄캄한 밤하늘보다, 어스름한 푸른 하늘 사이에 펼쳐지는 빛들이 가장 멋진 저녁시간의 장면을 만든다. 조명 설계회사에 다니며 현장 사진을 찍을 때는 해지기 전 미리 도착해 짧게 지나가는 이 시간을 기다렸다가 서둘러 사진을 찍곤 했다.
한국에서는 그토록 금방 지나갔던 멋진 이 블루 아워의 시간이, 위도 55도에서는 해가 누운 각도만큼 길게 늘어나 하루 중 가장 긴 장면이 된다. 덴마크의 하늘을 더욱 인상적으로 만드는 두 번째 마법이다. 빛은 순간의 상태가 아니라 시간을 가지고 움직이는 물질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덴마크를 대표하는 화가 페더 세버린 크뢰이어(Peder Severin Krøyer)의 그림에는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없다. 모든 것이 하나의 푸른 공기에 잠겨 있다. 이곳에서의 여름 밤을 겪어보면 덴마크 최북단 스카겐에 모여 푸른 대지를 그렸던 당시 많은 화가들의 눈 속에 들어가 볼 수 있다. 위도 55도가 스카겐 해변의 화가에게 매일 몇 시간씩 무료로 쥐여준 파란 빛이 가득한 풍경 속으로 말이다.
예술의 어떤 부분은 재능이 아니라 태어나 자란 주소의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웃어야 할지 부러워해야 할지 모를 생각을 나는 그 하늘 아래에서 했다. 그런데 이 하늘 아래에서 살아간 것은 화가들만이 아니었다.

저녁 산책 중에 카페와 가정집 창가를 보면 촛불에 가까운 색의 작은 조명들이 낮게 켜져 있다. 누군가는 어둡다고 느낄지 모르는 그 빛은, 창밖에서 두 시간째 이어지고 있는 황혼과 한 몸으로 이어져 있었다. 실내의 빛이 바깥의 빛과 싸우지 않는 것이다. 해가 순식간에 떨어져 실내가 서둘러 밝아져야 하는 서울의 저녁과는, 빛의 이어달리기 방식 자체가 달랐다.

그러니 좋은 빛이란 어쩌면 그 땅의 위도와 기후가 사람의 몸에 새겨 넣은 기억일지도 모른다. 뒤집어 말하면 좋은 빛에 절대 기준은 없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자기 하늘을 정확히 읽었다는 사실이다. 빛이 부족한 땅에서 그 부족을 이기려 들지 않고, 낮게 깔린 빛과 긴 어스름을 그대로 인정한 뒤 거기에 맞는 빛을 지었다. 흉내가 아니라 번역이다.
그리고 그 번역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남겼다. 전구를 갓 뒤로 감춰 눈부심을 지운 조명, 식탁 위 60센티미터까지 내려온 펜던트, 색유리 없이 벽돌의 색으로 빛을 물들인 교회, 커튼을 치지 않아도 서로 톤이 맞는 창문들. 나는 그것들을 '북유럽 감성'이라는 말로 뭉뚱그리고 싶지 않다. 하나하나가 이 하늘 아래에서 정확한 이유를 가지고 도달한 답이기 때문이다.
그 생각 끝에서, 뜻밖에도 서울의 하늘이 돌연 그리워졌다. 우리의 해는 빠르게 지고 여름 하늘은 뿌옇다. 그 대신 노을은 짧은 시간에 온 힘을 다해 타오르고, 장마가 지나 대기가 씻긴 가을이면 우리에게도 '높다'고 부를 수 있는 하늘이 온다. 코펜하겐이 여름 내내 가진 파랑을 우리는 가을에 몰아서 받는 셈이다. 남의 파랑을 부러워하며 서 있던 그 골목에서, 나는 우리가 이미 가진 하늘에 뒤늦은 인사를 건넸다. 우리의 답도 우리의 하늘 앞에서 찾으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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