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19일 영국 런던 로열오페라하우스(코벤트가든). 소프라노 리세트 오로페사가 주인공 엘비라로 선 벨리니의 오페라 ‘청교도’가 막을 내렸다. 오페라계 무대미술로 세계 최고를 자부하는 코벤트가든이 35년 만에 올린 ‘뉴 프로덕션’이었다. 이 거대한 무대의 설계자는 한국인 무대디자이너 신혜미(44·사진)였다.
“무엇을 더하기보다 필요 없는 것을 빼는 것이 무대디자이너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신혜미는 지난달 31일 한국경제 아르떼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디자인 철학을 이같이 설명했다. 무대에 놓인 모든 요소는 작품 안에서 분명한 기능과 의미를 지녀야 하며, 아름다운 장식을 덧붙이는 데 그치지 않고 음악과 인물의 내면을 공간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어떻게 로열오페라하우스의 주요 작품 무대를 맡게 됐을까.이후 뮤지컬 전문 무대디자이너 박성민을 만나면서 무대미술가로 진로를 정했다. “무대 모형이 실제 공연장의 거대한 공간으로 구현되는 과정이 신선했어요.” 대학을 졸업한 뒤 런던으로 건너가 무대디자인을 공부했다. 전환점은 2011년에 찾아왔다. 영국 공연예술계의 권위 있는 상인 ‘린버리프라이즈’를 받은 것이다. 이를 계기로 영국에 아무런 연고가 없던 그는 영국 공연예술계 중심부에 진입하게 됐다. 린버리프라이즈는 완성된 디자인을 평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디자이너가 연출가와 극장 제작진을 만나 아이디어를 실제 공연으로 발전시키도록 하는 제도다. 신혜미는 수상 이후 영국 국립극장과 영빅, 로열오페라하우스의 린버리극장 등에서 활동할 기회를 얻었다.

신혜미가 로열오페라하우스의 메인 무대를 책임지게 된 것은 연출가 리처드 존스와의 인연이 결정적이었다. 현대 오페라 연출의 거장으로 인정받는 존스는 로열오페라,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 뉴욕 메트로폴리탄과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오페라를 연출했다. 영국 최고 권위의 예술훈장인 CBE(대영제국 훈장)도 수훈했다. 에이전트를 통해 신혜미를 알게 된 존스는 1년간 그를 지켜본 뒤 영빅에 올릴 연극의 무대디자인을 제안했다. 이후 두 사람의 협업은 베를리오즈의 ‘파우스트의 겁벌’, 생상스의 ‘삼손과 데릴라’, 벨리니의 ‘청교도’로 이어졌다. ‘삼손과 데릴라’는 신혜미가 로열오페라하우스 메인 무대에 처음 입성한 의미 있는 작품이다.

2022년 ‘삼손과 데릴라’는 절제된 히브리인의 공간과 대비되는, 강렬한 패턴으로 필리스티아인의 세계를 표현했다. 최근작 ‘청교도’에서는 엘비라의 불안과 정신적 붕괴를 강조했다. 폐쇄된 공간을 감시할 수 있는 창과 통로를 넣고, 어두운 색채와 방어적인 구조로 억압된 세계를 드러냈다.
벽과 천장이 적은 개방형 무대도 특징이다. 하지만 이 구조는 성악가의 목소리를 객석으로 반사하는 데 불리하다. 이에 제작진은 무대 양옆과 뒤쪽에 플라스틱 반사면을 보완하고, 성악가의 얼굴 방향과 위치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음향적 약점을 줄였다. 그는 “성악가가 음향적으로 유리할지, 불리할지도 무대미술의 고려 대상이지만 결국은 연출가와 디자이너의 선택”이라며 “모든 요소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기술적 협업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인 성악가의 참여 소식에 기대와 걱정이 함께 있었어요. 하지만 리허설에서 백석종의 목소리를 듣고 걱정이 완전히 사라졌죠. 극장 관계자로부터 사랑받는 모습을 보고 저까지 뿌듯했습니다.”
최근 막을 내린 ‘청교도’에서는 한국인 테너 손지훈도 아투로 역의 커버 가수로 참여했다. “무대 리허설에서 손지훈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는데 정말 감탄이 나왔어요. 앞으로 세계적 무대에서 좋은 활약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오페라는 새로운 시각을 통해 관객이 느끼는 선입견과 거리감을 줄일 수 있어야 하죠. 잘 만들어진 오페라는 가장 깊고 풍부한 예술적 경험을 관객에게 공유할 수 있어요.”
그는 한국 오페라계에도 전통적인 작품과 실험적인 작품이 공존할 수 있는 다양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작품을 선정할 때 이미 이름이 알려진 거장의 프로덕션만 찾기보다 새로운 시각을 지닌 작품과 젊은 예술가에게도 기회를 줘야 한다”는 설명이다.
세계 오페라의 중심에서 한국인 디자이너로서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했지만, 신혜미는 여전히 자신을 ‘협업하는 창작자’로 정의한다. “오페라는 결코 혼자 만들 수 없어요. 디자이너의 아이디어를 현실로 바꿔주는 수많은 동료가 있죠. 그들과의 협업 의식을 가슴에 품고, 관객에게 가장 풍부한 예술적 경험을 전하는 무대를 계속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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