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씨는 도박중독자입니다. 버는 돈은 모두 도박으로 날렸고 가족에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내와는 결국 이혼했습니다. 외아들 B씨는 할머니 손에 자랐습니다. 다행히 할머니가 정성껏 키워준 덕분에 B씨는 어엿한 직장인이 됐습니다.
얼마 전 아버지 A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긴 것은 재산이 아니라 20억원에 달하는 빚이었습니다. B씨는 아버지의 빚을 대신 갚을 생각이 없어 곧바로 법원에 상속포기를 신청했습니다.
A씨가 사망했을 당시 그의 어머니 C씨는 노환으로 병상에 누워 있었습니다. C씨는 아들이 죽은 지 반년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B씨는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아버지와 할머니의 장례를 잇달아 치렀습니다. 시장에서 행상을 하며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의 죽음이 B씨에게는 더 큰 슬픔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할머니 장례를 치른 뒤 반년쯤 지나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버지 A씨의 채권자인 은행이 B씨에게 빚을 갚으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B씨는 이미 받아둔 상속포기 결정문을 보여줬습니다. 그런데도 은행은 “B씨가 빚을 갚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여기에는 상속순위와 대습상속의 복잡한 관계가 숨어 있습니다.먼저 상속순위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민법상 직계비속, 즉 자녀가 1순위 상속인입니다. 직계존속인 부모는 2순위입니다. 1순위 상속인이 없거나 모두 상속을 포기하면 상속권은 2순위로 넘어갑니다.
이 사건에서 A씨가 남긴 20억원의 채무는 자녀인 B씨가 상속포기를 하면서 어머니 C씨에게 넘어갔습니다. B씨로서는 아버지 빚을 포기했지만, 그 빚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음 순위 상속인인 할머니에게 승계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대습상속을 알아야 합니다. 대습은 ‘대신해서 이어받는다’는 뜻입니다. 피상속인보다 상속인이 먼저 사망한 경우 그 상속인의 자녀가 대신 상속받는 제도입니다.
이 사건에서 할머니 C씨가 사망했을 때 원래 상속인이 될 사람은 아들 A씨였습니다. 그러나 A씨는 이미 사망했습니다. 그러면 그의 자녀인 B씨가 할머니의 재산을 대습상속하게 됩니다.
문제는 상속재산에는 재산뿐 아니라 채무도 포함된다는 점입니다. 앞서 C씨에게 넘어갔던 A씨의 빚도 C씨의 사망과 함께 다시 B씨에게 내려오게 됩니다. 아버지 빚을 포기했는데 그 빚이 할머니를 거쳐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B씨는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나는 이미 아버지 채무를 갚지 않겠다고 상속포기를 했다. 그런데 그 빚이 할머니를 한 바퀴 돌아 나에게 다시 상속된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주장이었습니다.
대법원은 B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B씨가 포기한 것은 어디까지나 ‘아버지 A씨의 상속재산’일 뿐입니다. 할머니 C씨가 사망하면서 발생한 ‘할머니의 상속재산’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라고 봤습니다.
상속포기의 효력은 해당 피상속인과의 관계에서만 발생합니다. 아버지에 대해 상속포기를 했다고 해서 할머니에 대한 대습상속까지 자동으로 포기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대법원 2017. 1. 12. 선고 2014다39824 판결]
피상속인의 사망 후 상속채무가 상속재산을 초과해 상속인인 배우자와 자녀들이 상속포기를 했는데, 그 후 피상속인의 직계존속이 사망해 민법 제1001조, 제1003조 제2항에 따라 대습상속이 개시된 경우에 대습상속인이 민법이 정한 절차와 방식에 따라 한정승인이나 상속포기를 하지 않으면 단순승인한 것으로 간주된다. 위와 같은 경우에 이미 사망한 피상속인의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피상속인의 직계존속의 사망으로 인한 대습상속도 포기하려는 의사가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그들이 상속포기의 절차와 방식에 따라 피상속인의 직계존속에 대한 상속포기를 하지 않으면 효력이 생기지 않는다. 이와 달리 피상속인에 대한 상속포기를 이유로 대습상속 포기의 효력까지 인정한다면 상속포기의 의사를 명확히 하고 법률관계를 획일적으로 처리함으로써 법적 안정성을 꾀하고자 하는 상속포기제도가 잠탈될 우려가 있다.
B씨는 할머니가 사망했을 때 대습상속에 대한 포기 신고를 다시 했어야 합니다. 결국 상속포기를 두 번 해야 했다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빚을 포기했더라도 그 빚을 승계한 할머니가 사망했을 때 다시 상속포기나 한정승인을 하지 않으면 빚을 떠안을 수 있습니다.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속은 피상속인별로 따로 판단됩니다.
상속포기는 한 번 했다고 모든 관계에서 효력이 이어지는 제도가 아닙니다. 아버지에 대한 상속포기와 할머니에 대한 상속포기는 별개의 절차입니다. 상속채무가 얽힌 가족관계에서는 누가 먼저 사망했는지, 누가 상속을 포기했는지, 다음 순위 상속인이 누구인지까지 함께 따져봐야 합니다.
빚을 물려받지 않기 위해서는 사망 사실을 안 날부터 3개월 안에 상속포기나 한정승인을 해야 합니다. 특히 부모의 빚을 포기한 뒤 조부모가 사망하는 경우라면 대습상속 여부를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정인국 한서법률사무소 변호사/세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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