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인 투자 시장은 예전만큼 뜨겁지 않다. 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산업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대기업과 주요 시중은행들이 잇따라 뛰어들면서다. 국내만 봐도 삼성전자·현대자동차·포스코·쿠팡을 비롯해 주요 금융회사들이 스테이블코인 사업을 들여다보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가상자산 시장의 한 영역으로 여겨졌던 스테이블코인이 이제는 기업들의 결제와 금융 전략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삼성전자는 지난 7월 22일 열린 ‘갤럭시 언팩 2026’에서 삼성월렛의 금융서비스 확장 계획을 공개했다.
이날 리 딘햄 삼성전자 스마트폰 담당자는 “결제를 넘어 신분증, 탑승권 등을 관리하는 삼성월렛에 스테이블코인 등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자산도 포함할 계획”이라며 “갤럭시 제품과 서비스 전반과 연결된 금융 생태계를 기반으로 결제와 혜택, 디지털자산을 하나의 통합된 경험으로 누릴 수 있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에는 삼성전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스테이블코인 서비스를 내놓을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열흘 뒤 가상자산 전문 매체 샌드마크는 삼성전자로부터 받은 서면 답변을 통해 삼성전자가 올해 일부 국가를 시작으로 삼성월렛에 스테이블코인 계좌 개설과 국경 간 송금, 매장 결제 기능을 순차적으로 도입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지금까지 삼성월렛을 통한 결제가 등록한 신용·체크카드와 연결돼 대금이 빠져나가는 방식이었다면 앞으로는 삼성월렛에 보유한 스테이블코인 잔액에서 상품과 서비스 대금이 곧바로 차감된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이미 디지털자산을 담을 수 있는 자체 지갑을 구축해 수년 전부터 시장을 준비해왔다. 2019년 ‘삼성 블록체인 월렛’을 선보인 이후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등 주요 가상자산의 보관과 전송을 지원하고 있다. 이더리움 기반 USDC나 트론 기반 USDT 등도 이용자가 직접 추가해 관리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글로벌 거래소 코인베이스와 연동해 잔액 확인과 자산 거래를 지원하고 렛저(Ledger) 등 외부 하드웨어 지갑과의 연동도 제공하고 있다.
이번에 삼성이 주목하는 것은 ‘발행’보다 ‘유통’이다. 스테이블코인이 대중적인 결제수단으로 자리 잡으려면 발행량뿐 아니라 실제 이용자가 어디서 얼마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별도의 애플리케이션(앱)을 설치하거나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면 일상적인 결제수단으로 확산하기 어렵다. 반면 이미 사용하는 스마트폰과 월렛에 스테이블코인이 들어오면 새로운 서비스를 찾아갈 필요없이 기존 환경에서 디지털자산을 이용할 수 있다.
삼성은 이 같은 유통망을 이미 갖고 있다. 삼성월렛은 61개국에서 서비스되고 있으며 이용자만 약 1900만 명에 이른다. 전 세계에 보급된 갤럭시 스마트폰도 8억 대가 넘는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2분기 삼성전자의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점유율은 24%로 1위다. 2위 애플의 점유율은 20%였으며 현재 애플페이에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할 계획은 알려지지 않았다. 스테이블코인이 실제 결제수단으로 확산할 경우 삼성은 스마트폰과 월렛을 동시에 가진 만큼 유통 단계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다는 의미다.
삼성전자가 갤럭시 생태계에서 AI 에이전트 기능을 강화하고 있다는 점도 스테이블코인의 활용 가능성을 키우는 요소다. 현재 갤럭시 AI는 정보 탐색이나 일상적인 작업을 돕는 수준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사용자의 요청을 받아 상품이나 서비스를 직접 구매하는 단계까지 진화할 전망이다. AI가 스스로 판단해 소비 주체로 나설 때 가상의 세계에서 쓸 수 있는 독립된 ‘지갑’과 ‘돈’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블록체인 기반의 스테이블코인은 24시간 전송이 가능하고 국경이 없는 거래에 특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AI 에이전트의 가장 유력한 화폐 후보로 거론된다.
삼성그룹 차원의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다. 삼성증권·삼성SDS·삼성카드는 지난 5월 업비트 운영사 두나무 지분 4%를 약 6128억원에 인수하기로 했다. 삼성SDS는 이를 단순한 재무적 투자가 아니라 디지털자산 인프라 사업 진출을 위한 전략적 투자라고 설명했다. 두나무의 블록체인 운영 역량과 삼성SDS의 IT·AI·클라우드·보안 역량을 결합해 스테이블코인 인프라와 가상자산 금융 시스템통합(SI), AI 기반 차세대 결제 등의 사업 기회를 검토한다는 구상이다.
현대카드는 지난 7월 현대차 미국판매법인(HMA)과 멕시코판매법인(HMM) 간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 테더(USDT)를 활용한 국제 송금 실증(PoC)을 완료했다. 미국 법인이 2만달러를 USDT로 전환해 멕시코 법인으로 보내고 현지에서 다시 달러로 바꾸는 방식으로 송금과 검증을 포함한 전 과정은 단 7분 만에 끝났다. 기존 은행 간 국제 송금에 수시간이 소요되던 것과 비교하면 처리 속도가 대폭 단축된 셈이다.
이번 실증에선 블록체인 결제 인프라 기업 액심(Axyim)이 테더와 연계해 USDT를 조달하고 자금 이동은 액심의 지갑 사이에서 처리되는 방식을 취했다. 현대카드와 현대차는 이 과정에서 회계·세무·법무·내부통제 등 실제 기업 업무 시스템에 적용하기 위해 필요한 규제 준수 요건을 꼼꼼히 점검했다.
현대카드는 유럽 지역 해외법인을 대상으로 2차 실증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에는 달러뿐 아니라 현지 통화를 활용해 송금을 진행한다. 환전 비용 절감 효과까지 따져볼 계획이다.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서클과 비자 등이 참여할 예정이다.
현대차그룹이 스테이블코인 활용에 나선 이유는 새로운 결제수단을 확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미국, 멕시코, 유럽 등 세계 각지에 생산·판매 거점을 둔 현대차 입장에서는 국경을 넘나드는 자금 이동과 정산을 얼마나 빠르고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현대차의 사업 구조상 스테이블코인의 활용 영역은 법인 간 송금에만 머무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전 세계 생산공장, 딜러, 부품업체로 연결된 글로벌 공급망에서 부품대금이나 서비스 비용 정산 수단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도 있다.
차량이 소프트웨어중심자동차(SDV)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도 변수다. 충전·구독·차량 내 콘텐츠 등 차량을 둘러싼 서비스가 늘어나면 관련 결제와 정산 수요도 함께 커질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차량 자체가 다양한 디지털 서비스를 이용하고 결제하는 하나의 접점으로 진화할 수 있는 만큼 스테이블코인 역시 새로운 결제 인프라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쿠팡이 스테이블코인에서 주목하는 영역은 결제와 정산이다. 연간 77조원대의 결제망을 보유한 유통 플랫폼인 만큼 돈의 흐름을 최적화할 때 얻는 비용 절감 효과가 막대하다.
쿠팡은 우리은행과 원화 스테이블코인 활용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한 PoC를 진행했다. 쿠팡이츠의 주문 결제를 바탕으로 소비자가 결제한 돈을 가맹점주에게 정산하는 과정에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할 수 있는지를 시험한 것이다. 실증에는 쿠팡이 투자한 레이어1 블록체인 ‘템포(Tempo)’를 활용했다.
실제 가맹점이 아닌 가상의 가맹점을 대상으로 두 가지 실험을 진행했다. 먼저 기존 신용카드 등 결제망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가맹점주에게 돈을 지급하는 정산 단계만 스테이블코인으로 바꾸는 방식이다. 기존 결제망과 블록체인 기반 정산을 연결할 수 있는지를 확인했다.
두 번째는 결제부터 정산까지 모두 스테이블코인으로 처리하는 방식이다. 소비자가 스테이블코인으로 결제를 하고 판매자가 스테이블코인으로 대금을 받고 이를 다시 다른 결제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해 ‘결제→정산→재결제’가 플랫폼 안에서 이어지는 구조를 시험했다. 우리은행은 은행 계좌와 전자지갑을 연결해 원화와 스테이블코인을 서로 전환하는 역할을 맡았다.
가장 직접적인 수혜자는 판매자다. 현재 카드 결제가 이뤄진 뒤 정산까지 일정 시간이 걸리는 구조라면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할 경우 정산 속도를 크게 앞당길 수 있다. 실제 쿠팡이츠의 경우 판매자가 주문 매출을 정산받기까지 4영업일이 걸리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하면 사실상 실시간에 가까운 정산도 가능하다. 판매자 입장에선 매출이 발생한 돈을 더 빨리 받아 운영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규모도 작지 않다. 쿠팡이츠의 연간 결제액을 약 11조4000억원(추정액)으로 단순 환산하면 하루 평균 결제액은 약 312억원이다. 4영업일 동안 쌓이는 금액으로 환산하면 약 1250억원에 달한다. 정산 주기를 줄이면 이만큼의 자금이 판매자에게 더 빠르게 돌아갈 수 있다는 의미다.
쿠팡에도 이점이 있다. 대규모 거래가 반복되는 플랫폼에서는 결제와 정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수료와 중개 비용을 줄이는 것만으로도 비용 절감 효과가 커질 수 있다. 특히 가맹점주에게 지급된 스테이블코인이 쿠팡이나 쿠팡이츠에서 다시 사용된다면 플랫폼 안에서 자금이 반복적으로 순환하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
우리은행에도 새로운 사업 기회가 생긴다. 향후 기업과 소비자 사이에서 스테이블코인이 실제로 유통되기 시작하면 발행뿐 아니라 원화와 디지털자산을 연결하는 ‘관문’ 역할을 선점할 수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당장 체감하는 변화가 크지 않을 수 있다. 다만 기존 신용카드나 간편결제를 사용할 때와 사용자 경험(UI) 측면에서 큰 차이가 없어 거부감 없이 블록체인 기반의 새로운 금융서비스를 받아들일 수 있다.
포스코도 스테이블코인 관련 움직임이 분주한 대기업이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해외 법인과 거래처가 많은 종합상사의 특성을 활용해 블록체인 기반 해외송금과 무역금융을 시험하고 있다. LG CNS와는 무역 과정에서 발생하는 매출채권을 디지털자산으로 발행·관리하는 실증을 진행했고 하나금융·두나무와는 블록체인 기반 해외송금·결제 인프라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기존에 1~2일 걸리던 해외송금을 수분 내 처리하고 향후에는 매출채권 발행부터 자금조달·송금·정산까지 무역금융 전 과정을 온체인으로 연결하는 것이 목표다.
민간 진영이 스테이블코인 도입에 속도를 내는 반면 이를 뒷받침할 제도화는 그동안 지연돼 왔다. 국회에는 여야가 발의한 디지털자산기본법안들이 계류돼 있으며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발행 주체와 가상자산 거래소 대주주 지분 제한 등을 둘러싼 이견이 입법의 주요 쟁점으로 남아 있다. 미국, 유럽, 일본 등이 관련 규율 체계를 마련하고 시장 선점에 나선 것과 대조적이다.
다만 금융위원회가 지난 7월 대통령 업무보고를 통해 연내 디지털자산기본법을 마련하고 스테이블코인의 발행·유통을 제도화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여당은 9월 당정 통합안 마련을 예고했다. 장기간 지연됐던 디지털자산 2단계 입법이 올해 안에 진전을 이룰 수 있을지 주목된다.
☞용어설명
스테이블코인
쉽게 말하면 ‘가격이 고정된 디지털 화폐’다. 달러 또는 다른 실물자산에 일대일로 연동한다. 그래서 이름도 ‘Stable(안정적인) + Coin(화폐)’이다. 반면 비트코인은 가격이 급등락하는 대표적인 ‘변동성 자산’이다. 스테이블코인은 대부분 토큰(Token) 형태로 발행한다.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처럼 자체 블록체인을 가진 코인이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는 블록체인 위에 발행·유통하는 디지털자산이다. 일종의 상품권이나 포인트와 유사한 구조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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