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자본에 30년 산업 맡길 수 있나"…고려아연 놓고 나온 '경고'

입력 2026-08-25 09:30  

"5년 자본에 30년 산업 맡길 수 있나"…고려아연 놓고 나온 '경고'


다음달 9일 고려아연 임시주주총회를 앞두고 경영권 분쟁을 단순한 지분 경쟁이 아니라 국가기간산업의 지배권과 자본 회수 논리가 충돌하는 문제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단기 수익을 중시하는 금융자본의 시간표와 수십 년에 걸쳐 설비·기술·인력을 축적해야 하는 장치산업의 시간표가 다른 만큼 장기투자와 경제안보 관점까지 함께 따져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25일 업계에 따르면 의결권 자문사 서스틴베스트의 류영재 대표는 최근 소셜미디어(SNS)에 자신의 칼럼 '미국이 버린 교과서, 우리는 왜 주워서 외우나'를 소개하며 이 같은 견해를 밝혔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을 지낸 류 대표는 금융 논리가 산업 논리에 앞설 경우 장기 설비·기술·인력 투자가 뒤로 밀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제련소는 대형마트와 또 다르다"
류 대표가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에서 특히 주목한 것은 제련업의 특수성이다. 그는 "제련소는 대형마트와 또 다르다"며 "제련업의 경쟁력은 토지와 건물이 아니라 안정적 조업, 축적된 공정기술, 숙련인력, 원료 조달과 판매망의 결합에서 나온다"고 밝혔다.

이어 "고려아연은 국내 유일의 안티모니 생산기업이며 중국의 수출통제 이후 안티모니의 방산·반도체 공급망 전략성은 한층 커졌다"고 설명했다. 고려아연의 지배구조 변화가 한 기업의 경영권 이동을 넘어 생산기반과 공급망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취지로 읽힌다.

류 대표는 "세계 최대 비철금속 제련기업의 경영권 다툼을 보며 미국 러스트벨트와 영국 미들랜즈의 녹슨 굴뚝이 떠오른다"며 금융 논리가 산업 논리에 앞설 경우 장기 설비·기술·인력 투자가 뒤로 밀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현 경영진의 지배권을 무조건 보호해야 한다는 취지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오너 경영의 문제점은 엄격하게 견제하되 그 과정에서 기간산업의 장기 투자능력까지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류 대표는 "경영진의 책임성과 산업기반의 지속가능성은 양자택일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5년의 시계'와 '30년의 산업'
류 대표는 금융자본과 장치산업이 바라보는 시간의 차이를 '5년의 시계, 30년의 산업'으로 압축했다. 부채를 활용해 기업을 인수하고 자산을 매각하거나 배당한 뒤 다시 매각하는 것은 사모펀드의 정당한 금융기법이지만, 이런 회수 구조가 장기간 투자를 전제로 하는 산업과 결합하면 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

그는 "설비 보전과 증설, 환경·안전 투자, 인적 투자, 기술 축적이 단기 현금흐름에 밀릴 위험은 없는가"라는 질문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홈플러스 사례도 들었다. MBK는 2015년 기존 차입을 포함해 약 7조2000억원 규모로 홈플러스를 인수한 뒤 점포 매각과 재임차를 이어갔다. 홈플러스는 2025년 회생절차를 신청했다. 류 대표는 "높은 금융부담과 자산유동화가 영업기반을 잠식한다는 우려는 현실이 됐다"고 평가했다.

그가 단기 자본의 시간표를 견제할 주체로 꼽은 곳은 국민연금이다. 국민연금은 고려아연의 주요 주주인 동시에 MBK 등 사모펀드의 출자자이기도 하다.

류 대표는 "5년의 시계를 가진 자본을 견제할 수 있는 것은 결국 30년의 시계를 가진 자본"이라며 그 출발점으로 국민연금을 꼽았다. 출자자로서는 운용사의 자본 회수 방식에 장기 산업의 기준을 요구하고, 주주로서는 현 경영진과 인수자 모두에게 같은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국민의 노후자금은 본래 가장 긴 시계를 가진 돈"이라며 "그 돈이 가장 긴 시계로 투자하게 만드는 것이 책임투자의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재무 잣대에 밀리는 장기 혁신
류 대표의 문제의식은 고려아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NPV(순현재가치), IRR(내부수익률), 투자회수기간 등 전통적인 투자평가 지표가 새로운 시장을 만드는 장기 혁신투자를 평가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 지표는 미래 현금흐름 추정을 전제로 한다. 아직 시장 자체가 형성되지 않은 사업을 기존 사업이나 효율 개선형 투자와 같은 기준으로 평가하면 시장창출형 혁신이 상대적으로 불리해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류 대표는 혁신경영학자 클레이튼 크리스텐슨의 '자본가의 딜레마(The Capitalist's Dilemma)'를 인용해 재무적 잣대가 지배적일수록 새로운 시장을 만드는 투자보다 비용 절감과 효율 개선에 자본이 쏠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 S사가 HBM(고대역폭메모리) 시장 대응에서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던 당시 재무·관리 중심 의사결정과 연구개발(R&D) 조직 위축의 연관성을 지적한 분석도 거론했다.

영국과 미국 제조업의 쇠퇴 과정도 사례로 제시했다. 케임브리지대 마이클 키슨 교수와 옥스퍼드대 조너선 미치 교수가 영국 제조업 쇠퇴 과정에서 만성적 과소투자와 단기 수익 중심의 금융 논리를 지적한 연구를 소개했다. 미국 기업전략이 '유보하고 재투자하라'에서 '다운사이징하고 분배하라'로 이동하면서 장기 생산·혁신 역량을 약화시켰다고 분석한 윌리엄 라조닉 매사추세츠대 교수의 연구도 제시했다.

주주환원이 곧바로 장기투자 위축으로 이어진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학계의 반론도 함께 짚었다. 기업이 필요하면 신주 발행 등을 통해 자본을 다시 조달할 수 있는 만큼 주주에게 자금이 돌아갔다는 사실만으로 투자 여력이 줄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류 대표도 이런 반론을 인정했다. 다만 자본을 다시 조달하는 것과 산업 생태계를 복구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봤다. 그는 "자본은 환원했다가 다시 시장에서 조달할 수 있어도 한 번 끊긴 생산 생태계와 숙련은 되사오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전략산업 지배권 이동 때 경제안보 심사 제안
류 대표는 고려아연 사태를 계기로 전략산업 기업의 지배권 이동을 경제안보 관점에서 심사하는 제도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미국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를 사례로 들었지만 이를 고려아연 사태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설명했다. CFIUS가 기본적으로 외국인 투자를 대상으로 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대신 투자자의 국적과 관계없이 국가핵심기술과 전략광물, 핵심 공급망을 보유한 기업의 지배권이 일정 수준 이상 이동할 경우 경제안보에 미칠 영향을 평가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다만 이런 제도가 기존 경영진의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악용되지 않도록 독립적인 심사기구와 공개된 기준 등 안전장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류 대표는 전략 제조업의 가치를 단기 이익과 주주환원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공급망을 지킬 능력과 기술인력, 장기 투자를 감당할 재무구조까지 함께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본은 국경을 넘지만 설비와 기술인력, 공급망이 빚어내는 산업역량은 쉽게 옮겨지지 않는다"며 "미국과 영국이 너무 늦게 깨달은 이 사실을 우리가 같은 경로를 따라 동일한 비용을 치르고 배울 필요는 없다"고 밝혔다.

홍민성 한경닷컴 기자 msho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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