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구점 하면서 집도 사고 아이들 대학까지 다 보냈습니다. 잘 벌 땐 억대도 벌었죠. 하지만 다이소, 쿠팡에 밀려서 도저히 버텨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서울 양재동에서 몇십년 동안 대형 모닝글로리 매장을 운영하다 지난해 결국 폐업한 한 자영업자의 한탄이다. 다이소의 균일가 공세와 이커머스 초저가 무료배송 앞에 영세 문구점은 사라질 수밖에 없단 것이다. 과거 아이들의 하굣길 참새 방앗간 역할을 하던 동네 문방구들이 빠르게 자취를 감추고 있다.
국세청 국세통계포털에 따르면 전국 문구점 사업자 수는 올해 1월 1만1개에서 지난 6월 9854개로 1만개 선이 무너졌다. 2024년 6월 1만302개, 2025년 6월 1만158개였던 점을 감안하면 매년 150~300개씩 가파르게 문을 닫고 있는 셈이다.
골목 문구점의 쇠락은 단순한 저출생이나 학령인구 감소 때문만은 아니다. 문구를 소비하는 방식 자체가 완전히 바뀐 영향이 컸다.
필기구, 공책 등 '단순 기능재' 영역은 다이소와 이커머스가 장악했다. 1000~2000원대 초저가를 앞세운 다이소가 일상 수요를 흡수했고, 쿠팡은 밤에 주문하면 등교 전 도착하는 로켓배송으로 학부모들을 끌어당겼다. 여기에 배달의민족, 쿠팡이츠 등 배달 플랫폼까지 문구류를 1~2시간 만에 배달하는 퀵커머스 서비스를 본격화했다. 2011년 도입된 학교 학습 준비물 '무상 지원' 제도로 신학기 대목마저 사라지며 영세 문구점의 설 자리는 사라졌다.

반면 '감성'과 '경험'을 파는 문구 시장은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종각 영풍문고의 맞춤형 노트 매장 '페이퍼테일러', 북촌 골목의 '서울스티커샵'을 비롯해 성수·연남동 일대 문구 편집숍에는 2030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직접 종이의 질감을 만져보고, 황동 문진과 만년필을 써보며, 자신의 취향에 맞는 스티커와 노트를 조합하는 '경험'을 소비하기 위해서다.
온라인에서도 취향 큐레이션 플랫폼으로의 쏠림이 뚜렷하다. 무신사가 운영하는 29CM의 지난 6월 문구류 거래액은 전년 동월 대비 71% 급증했다. 통상 다이어리를 많이 찾는 연말·연초 성수기가 아닌 여름 비수기임에도 다이어리와 플래너 거래액은 90% 이상 폭증했다. 입점한 신진 문구 브랜드의 성장세도 가파르다. 드로잉페이퍼의 올해 5월까지 누적 거래액은 전년 동기 대비 47% 이상 늘었고, 독서용품 브랜드 오니프는 60% 이상 증가했다.
오프라인 무대로의 확장도 두드러진다. 29CM가 코엑스에서 연 문구 페어에는 5일간 관람객 2만5000명이 몰렸다. 라이프스타일 편집숍 이구홈 성수 1호점의 지난 5월 매출에서도 문구용품이 판매 비중 상위권에 올랐다. 29CM는 오는 9월 일본 유명 문구 브랜드 '로프트(LOFT)'와 대규모 팝업스토어를 여는 등 문구 카테고리를 전략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문구 시장의 생존 공식이 '초저가·초고속'의 가성비 영역과 '취향과 감성'을 파는 프리미엄 영역으로 양분되고 있다고 풀이했다.
디지털 기기가 일상화되면서 단순 기록을 위한 필기구 수요는 사라졌지만, 오히려 손으로 일기를 쓰고 다이어리를 꾸미는(다꾸) 행위 자체가 하나의 '아날로그적 힐링'이자 '취향을 드러내는 라이프스타일'로 격상됐다는 것. 단순히 글씨를 쓰는 펜이 아니라 책상 위를 꾸미는 데스크테리어 소품이자 자신을 표현하는 '굿즈'로 소비되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당장 필요한 실용적 문구는 다이소나 쿠팡에서 1원이라도 싸고 빠르게 구매하는 반면, 나만의 취향과 심미적 만족을 주는 문구는 오프라인 편집숍을 직접 찾아 비싼 값을 치르더라도 경험하고 구매하는 패턴이 고착화됐다"며 "문구가 단순 학용품에서 라이프스타일 상품군으로 재정의되면서 문구 유통의 지형도 완전히 갈리고 있다"고 말했다.
박상경 한경닷컴 기자 highseou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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