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지주 회장의 연임 제한을 골자로 한 ‘지배구조 선진화’ 작업이 기약 없이 공전하고 있다. 금융지주 회장의 3연임을 사실상 막는 ‘금융회사 지배구조법’ 개정안이 추진 동력을 잃고 있어서다. 위헌 논란, 이재명 정부의 지지율 하락, 금융권의 자발적인 세대교체 단행 등이 주요 원인이다. 이 때문에 금융당국이 공언한 지배구조 개선안 시행 시점도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하지만 금융 회사들은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이 직접 금융지주를 향해 '부패한 이너서클'이란 질타를 쏟아낸 만큼 지배구조 선진화 방안 도입 자체가 무산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해서다. '셀프 연임'부터 '참호 구축'까지 각종 논란을 낳은 금융지주의 지배구조는 향후 어떻게 달라질까.
대통령의 한마디에서 시작
금융지주의 지배구조가 뭇매를 맞기 시작한 것은 이재명 대통령의 공개 질타 직후였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금융위원회 업무보고에서 "가만 놔 두니 부패한 '이너서클'이 생겨 멋대로 소수가 돌아가며 계속 지배권을 행사한다"며 폐쇄적인 구조를 비판했다. "그냥 방치할 일이 아니다"라는 말도 보탰다. 이 대통령이 당시 이례적으로 금융지주의 지배구조를 비판하고 나선 것은 금융지주 회장과 행장 선임 과정에서 대통령은 물론 비서실장, 정책실장 등 핵심 참모에게 투서가 쏟아져서다. 이 대통령은 "누구는 나쁜 사람이고, 선발 절차에도 문제가 있다는 등의 투서가 엄청나게 쏟아진다"며 "그 주장들이 단순한 경쟁 관계에서 발생하는 음해가 아니고, 상당히 타당성 있는 측면이 있다"고 했다.

금융당국 수장들은 즉각 조치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근본적으로 이사회의 기능과 독립성이 크게 미흡해 벌어지는 일"이라며 "지배구조 개선 태스크포스(TF)를 출범시켜 금융위와 함께 협의해 입법 개선 과제를 연내 도출한 뒤 법안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했다.
금감원은 전 금융지주사를 대상으로 지배구조 관련 특별점검도 시행했다. 은행지주들이 지난 2023년 마련한 '지배구조 모범관행'을 형식적으로만 이행하거나 편법으로 우회한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이를 집중 점검한다는 취지다. 이사회와 참호를 구축해 최고경영자(CEO) 선임 과정에서 이사회의 실질적 검증 기능이 약화된 점, 이사회 및 각종 위원회가 중요한 결정을 사후적으로 추인하는 수준인 점, 사외이사의 실질적인 견제·감시 기능이 퇴색된 점 등도 문제로 지적된다.
하나금융지주가 회장 후보 롱리스트 선정 직전 함영주 회장에게 유리하게 '이사의 재임 가능 연령 규정'을 바꿔 연임을 결정한 점, 빈대인 회장 연임이 결정된 BNK금융지주의 내외부 후보군 대상 후보 서류 접수 기간이 15일이지만 실제로는 5영업일에 불과한 점 등이다.
신한은행은 이사회 역량 진단표(BSM)상 전문성 항목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이사회 구성의 다양성이 떨어지고, 신한금융지주는 사외이사 평가 시 설문 방식으로만 평가하고 결과도 전원 재선임 기준 등급(우수) 이상을 부여한 점이 지적됐다.
금융당국은 즉각 금융권 지배구조 선진화 TF도 꾸렸다. 건전한 지배구조가 금융 시장 발전을 위한 필수라고 판단해서다. 권대영 금융위 부위원장은 "현재 우리 금융 회사들의 지배구조 실태를 보면 폐쇄적인 지배구조에 대한 비판, 불안정한 지배구조로 인한 갈등 등 여러 문제가 반복해서 노정됐다"며 "특히 은행지주회사의 경우 엄격한 소유 규제로 소유가 분산됨에 따라 주인 없는 회사의 특성을 갖고 있어 회장 선임 및 연임 과정에서 참호 구축에 대한 비판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고 꼬집었다.
1안이냐 2안이냐, 당정의 고민
금융 회사 이사회의 독립성과 다양성 제고, 최고경영자(CEO) 선임 등 경영 승계 과정에서 제기된 문제점 해결, 성과보수체계의 합리성 향상, 지배구조 관련 낡고 불합리한 관행 개선 등이 TF 주요 과제다.
앞서 마련된 ‘모범관행’으로는 금융지주 지배구조를 개선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법제화 논의에 힘을 보탠 상태다. 금융당국은 2023년부터 국내외 모범 사례를 참고해 만든 '은행지주·은행의 지배구조에 관한 모범 관행'을 업계에 적용하고 있다. 다만 이 같은 모범 관행을 통해 지주 회장 등의 장기 연임과 내부 유착을 막아낼 수 없다는 게 금융당국 판단이다.

금융지주 지배구조 선진화 방안은 앞선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지주 회장의 3연임 제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지배구조 개선 TF를 꾸린 금융당국은 지난 7월 두 가지 방안을 국회에 제시했다. 1안은 연임을 한 차례만 허용해 세 번째 임기를 법으로 금지하는 것. 2안은 최초 선임 때 과반, 첫 연임 때 70%, 세 번째 임기 때 90%를 요구하는 식으로 주총 찬성 요건을 단계적으로 높이는 방식이다. 금융권 안팎에선 청와대는 두 가지 방안 중 첫 번째 안을 선호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지난 9월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제1소위원회 안건에 금융지주 회장의 연임 요건을 다룬 '금융회사 지배구조법' 개정안은 포함되지 않았다. 정기국회 첫 법안소위 심사 대상에서 빠지면서 법제화 논의도 당분간 속도를 내기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나온 이유다. 시행 시점이 미뤄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금융위는 지난 3월 금융지주 회장의 장기 연임과 최고경영자(CEO) 승계 절차, 이사회 독립성 등을 손보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세부 방안을 둘러싼 정부 내 이견을 좁히는 데 시간이 걸리면서 발표가 미뤄진 바 있다.
금융위는 지난 3월 지배구조 개선안을 발표할 예정이었지만 발표 당일 돌연 일정을 취소하기도 했다. 개선안에는 회장 연임시 주주총회 특별결의 도입과 사외이사 독립성·전문성 강화 등이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금융권에서는 금융위와 금융감독원 간 이견설, 청와대 개입설 등 여러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금융권에서는 "개선안 내용과 정책 수위를 둘러싼 막판 조율이 길어지고 있다"는 얘기가 나왔다.
업계에선 수차례 연기된 지배구조 선진화 관련 입법 움직임이 재개되더라도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고 보고 있다. 실제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위 내부에서조차 직접적으로 임기 횟수를 제한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전문가들 역시 민간 금융회사 임원의 재직 횟수를 법으로 제한할 경우 헌법상 직업 선택의 자유와 주주의 이사 선임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는 상태다.

"해외에도 없는 규제"…제동 걸린 법제화
금융권 관계자는 "2안 역시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단언했다. 실제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금융지주 회장 선임안은 통상 90% 안팎의 찬성률로 통과된다. 찬성 요건을 80% 안팎까지 높여도 대부분 연임을 막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곽현준 국회 정무위원회 수석전문위원 역시 해당 법안 검토보고서에서 "대표이사의 선임·연임 과정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 필요성이 크다는 의견이 있다"면서도 "최근 4대 금융지주의 연임 관련 주주총회 결과를 보면 80% 이상의 높은 찬성률로 연임 결의가 이뤄지는 경우가 많아 의결 요건을 강화해도 연임 방지 효과는 제한적이고 민간 영역에 대한 과도한 제한이라는 비판 우려도 있다"고 했다. 금융위 입장을 인용해 "대표이사 연임 자체를 제한하는 글로벌 사례를 찾기 어렵다며, 해외 입법례 등을 고려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입장도 함께 전했다.
정부는 이 밖에도 사외이사의 명칭을 경영진과의 독립성을 강조한 ‘독립이사’로 바꾸는 방안도 국회에 발의된 개정안에 담겨 있다(일반 상장 회사는 이미 2026년 7월 23일부터 독립이사 체제가 시행 중). 임원추천위원회(임추위) 전원을 독립이사들로만 채워 투명성을 높이겠다는 취지다. 현재는 3인 이상으로 구성된 임추위의 과반만 사외이사인 체제지만, 앞으로 이를 100% 독립이사로 전면 개편할 경우 회장이나 사내이사 등 현직 경영진의 후보 추천 과정이 보다 공정해질 수 있어서다.
금융권에서는 KB금융 회장 교체가 또 하나의 변수가 됐다고 보고 있다. 금융지주 지배구조 선진화 1호 사례로 유력했던 KB금융이 업계 예상을 깨고 세대교체를 단행하면서다. KB금융지주 회장후보추천위원회는 이재근 KB금융지주 글로벌사업부문장을 차기 회장 단일 후보자로 최종 선정했다. 회추위는 2차 회장 후보군(쇼트리스트)에 오른 양종희 KB금융 회장과 이 부문장, 권광석 전 우리은행장 등을 인터뷰한 뒤 이 부문장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줬다.
앞서 업계 다수가 양 회장의 연임이 유력하다고 봤다. 지배구조 개편안의 발표와 후속 입법이 늦어지면서 금융권 곳곳에서 양 회장의 연임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는 평가도 나왔다. 하지만 회추위는 "현재의 우수한 성과에 머무르지 않고 그룹의 본원적 경쟁력 강화와 미래 성장 동력 확보를 위해 과감한 변화와 세대교체가 필요한 시점"이라며 이를 이끌 적임자로 이 부문장을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연임 논란을 불식시킬 세대교체 이외에도 금융지주가 직접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작업을 펼치고 있다. 이사회 다양성을 강화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사회부터 바꾼 금융지주
KB, 신한, 하나, 우리, BNK, JB 등 6개 금융지주는 사외이사 35명 가운데 13명을 교체하기로 했다. 금융당국의 요구를 반영해 차기 이사회를 꾸린 셈이다. 금융당국이 직접 필요성을 언급했던 정보기술(IT) 보안과 금융소비자 보호 전문가를 새 사외이사로 추천한 것이 대표적이다. 류정혜 대통령 직속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 위원(우리), 박혜진 서강대 AI소프트웨어융합대학원 특임교수(BNK), 최현자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하나), 정용건 전 금융감시센터 대표(우리) 등이 금융지주의 새 사외이사 후보 명단에 올랐다. 신한금융(박종복 전 SC제일은행장)과 JB금융(이동철 전 KB금융 부회장)은 수십 년간 금융사에서 근무하면서 각 분야 실무부터 경영까지 모두 경험한 인물을 새 사외이사 후보로 선택했다.
교수 출신 사외이사 비중은 소폭 줄었다. 우리금융은 새 사외이사 2명을 모두 민간 기업 출신으로 영입하면서 교수 출신 인원이 기존 3명에서 1명으로 감소한다. KB금융도 서정호 변호사를 새 사외이사로 추천하면서 교수 출신이 4명에서 3명으로 축소된다. 이들을 포함한 6개 금융지주의 교수 출신 사외이사는 기존 19명에서 17명으로 줄어들 전망이다.

업계에선 금융당국이 금융지주 회장의 3연임을 금지하는 방안을 법에 명문화하는 대신 주주총회 특별결의 제도를 통해 3연임 장벽을 높이는 방안 등을 보완책으로 추진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는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금융회사 지배구조법' 개정안을 마련한 상태다.
3연임 금지를 법제화하려던 국회 내부에서 조차 "3연임 금지를 법제화하는 조항을 넣을 경우 위헌 소지 등 논란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 탓이다. 금융권 지배구조 폐쇄성에 관한 이 대통령의 강도 높은 문제의식에 부합하면서도, 관치금융이라는 비판이 나오지 않도록 균형점을 찾는 데 고심하는 분위기도 읽힌다.
당사자인 금융권에서는 3연임을 일률적으로 가로막는 규제가 시행될 경우 부작용이 크다는 의견을 여러 차례 직간접적으로 전달한 상태다. 업계 관계자는 "3연임을 원천 차단하게 되면 사실상 두 번째 임기의 첫해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2년 가까운 기간 동안 레임덕이 지속될 우려가 크다"며 "금융지주의 미래 먹거리보다 단기 성과에 치중하도록 부추기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당정은 주주총회 특별결의 요건을 강화할 경우 3연임을 법으로 제한하지 않더라도 3연임 방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다음 시험대는 농협·iM
김현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개정안에는 금융사 CEO가 연임할 때 주주총회 특별결의를 거치도록 의무화하는 방안이 포함됐다. 현재는 임원후보추천위원회의 추천과 이사회 의결을 거쳐 선임되며, 정관에 따라 발행주식 총수의 4분의 1 이상이 참석하고 출석 주주 과반이 찬성하는 일반결의로 선임이 가능하다.

하지만 현직 대표가 자신을 선임할 사외이사 구성에 입김을 넣고, 그 사외이사들이 다시 대표의 연임을 승인하는 '셀프 연임' 구조가 고착화되면서 마땅한 견제 수단이 없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개정안은 대표이사가 연임에 도전할 경우, 일반결의보다 문턱을 대폭 높여 발행주식 총수의 3분의 1 이상 출석에 출석 주주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는 특별결의를 통과하도록 했다.

일각에서는 대통령 지지율까지 하락하자 금융 회사 인사가 정부에 개입한다는 비판을 감수하며 법제화를 밀어붙일 동력이 약해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법제화 대신 금융위가 임원후보추천위원회나 주총의 의결 요건을 높이는 방안을 지배구조 모범규준이나 가이드라인에 담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KB금융의 차기 수장 인선이 일단락되면서 업계 관심은 농협금융과 iM금융으로 쏠리고 있다. 금융권에 따르면 이찬우 농협금융지주 회장 임기는 내년 2월 초, 황병우 iM금융 회장은 3월에 임기가 종료된다. 각 사에서 조만간 차기 회장 선임 절차에 착수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다만 3연임을 직접적으로 눈앞에 둔 금융지주 수장이 없기 때문에 금융지주 지배구조 선진화 작업과 무관하게 회장 선임 절차가 진행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함영주 하나금융 회장의 임기는 2028년 3월, 진옥동 신한금융 회장, 임종룡 우리금융 회장, 빈대인 BNK금융 회장은 모두 2029년 3월에 2기 임기가 만료된다.
박재원 한국경제 기자 wonderfu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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