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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미·중 AI 패권전쟁, 한국에는 '제3의 길'이 있다

입력 2026-09-29 18:04   수정 2026-09-30 01:22

얼마 전 싱가포르의 AI 정책 고위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꽤 솔직한 고민을 들었다. 싱가포르 같은 작은 나라는 AI 원천기술을 직접 개발하기 어려운데, 그렇다고 앞으로의 핵심 산업 인프라를 미국이나 중국 어느 한쪽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일도 부담스럽다는 얘기였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고객을 만나면서 비슷한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예전에는 기술을 팔 때 성능과 가격이 중요했다. 지금은 고려사항이 하나 더 늘었다. “이 기술은 어느 나라 기술인가.” AI가 기술안보 문제가 되면서, 기술의 국적도 제품의 스펙이 되고 있다.

AI 패권 경쟁은 이미 두 개의 다른 경주로 갈라지고 있다. 하나는 더 뛰어난 지능을 만드는 경쟁이다. 초거대 모델과 초지능으로 가는 이 레이스에서는 당분간 미국이 앞선다고 본다. 세계 최고의 인재와 자본, 컴퓨팅 인프라가 미국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경주가 있다. 이미 만들어진 지능을 실제 물리 세계에 얼마나 빨리 퍼뜨리느냐는 피지컬 AI 경쟁이다. 여기서는 중국이 만만치 않다.

중국의 힘은 거대한 제조업 기반에서 나온다. 중국에는 수많은 공장과 로봇, 생산설비가 있다. 피지컬 AI에서는 로봇이 실제 작업을 하면서 쌓이는 현장 데이터가 중요한 학습 자산이다. 중국에서는 로봇 학습에 필요한 데이터를 더 잘 얻기 위해 공장 자체를 새롭게 설계하려는 시도까지 나타나고 있다. 공장이 데이터를 낳고, 데이터가 AI를 키우고, AI가 로봇을 더 똑똑하게 하고, 그 로봇이 다시 공장을 바꾼다. 이 순환이 자리를 잡으면 제조업 경쟁의 속도 자체가 달라진다.

이런 가운데 미국 기업은 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생산기지를 인도나 베트남으로 옮기고 있다. 인도와 베트남의 저렴한 인건비는 분명 강점이지만, AI와 로봇이 함께 움직이는 첨단 제조에는 반도체·AI·로봇·정밀 제조를 하나로 묶는 산업 생태계가 필요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의 가능성이 보인다. 한국에는 반도체와 메모리가 있고 자동차·조선·전자와 공장이 있다. AI와 로봇 기술도 빠르게 쌓이고 있다. AI 반도체를 설계하고 이를 실제 제조 현장에 넣어 검증할 수 있는 산업 기반을 동시에 갖춘 나라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미국이 주도하는 AI 생태계 안에서 한국은 피지컬 AI와 첨단 제조의 핵심 거점이 될 수 있다.

해외에서 사업하면서 발견한 한국의 또 다른 경쟁력은 의외로 ‘패권국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럽과 일본의 고객들을 만나보면 미국 기술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것도, 중국 기술에 의존하는 것도 부담스러워한다. 반면 한국 기술에 대한 지정학적 경계는 상대적으로 낮다. 한국은 기술 강국이지만 패권국은 아니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 거세질수록 오히려 강점이 될 수 있다. 세계가 어느 한쪽에 종속되지 않는 기술적 대안을 찾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국이 던져야 할 질문은 미국을 택할 것인가, 중국을 택할 것인가가 아니다. 그 질문 자체가 우리를 오래도록 작게 만들었다. 진짜 질문은 두 거인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공간을 다른 나라보다 먼저 차지할 수 있느냐다.

나는 싱가포르 관계자들에게 “모든 원천기술을 직접 개발하기보다 새로운 피지컬 AI 기술을 실증하는 테스트베드가 되고, 검증된 기술을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동남아 시장으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 대화를 마치고 나니 오히려 한국의 자리가 더 선명하게 보였다. 미·중 AI 패권 경쟁이 격해질수록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또 하나의 초강대국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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