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일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만난 야코브 스텐베크(45)는 지난달 보험회사에 재취업했다. 아내의 근무지인 스위스, 브라질, 일본에서 세 딸의 육아를 전담한 지 12년 만이다. 유럽에서 가장 유연한 고용 제도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파울 프레데리크 하슬뢰우(54)는 20년간 근무한 덴마크 공영방송에서 해고된 뒤에도 경력단절을 피하고 있다. 지난 1년 반 동안 5~6곳의 회사를 거쳤다. 6개월짜리 계약직이 끝난 이달 2일 다시 실업자가 됐지만 일자리 걱정은 하지 않는다. 오는 19일부터 2개월간 계약직으로 일한 뒤 크리스마스 이후에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을 계획이다. 그는 “직전 소득의 최대 90%까지 보장하는 실업보험기금(A-kasse)이 있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덴마크는 유럽에서 해고가 가장 쉬운 나라다. 그 대신 유럽 최대 수준의 실업급여와 안정적인 재취업을 보장한다. 높은 고용유연성(flexbility)과 탄탄한 사회안전망(social security)을 결합한 덴마크의 노동시장 정책을 ‘플렉시큐리티(flexicurity)’라고 부르는 이유다.
기업은 쉬운 해고 덕분에 경기 변동과 산업 구조 변화에 맞춰 인력을 신속하게 재배치할 수 있다. 근로자는 실업보험기금이 지급하는 실업급여로 생계를 유지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21년 연례협의 보고서에서 “기업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복지와 노동시장 제도가 흡수해주기 때문에 구조조정이 상대적으로 빠르다”고 분석했다. 2023~2024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에서 덴마크는 산업 간 직원 재배치로 생산성을 1.6%포인트 높였다.
탄력적인 인력 재배치 덕분에 덴마크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106.5달러(2024년 기준)로 OECD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57.5달러)의 두 배가 넘는다. 덴마크는 낙농강국으로 알려져 있지만 덴마크 국내총생산(GDP)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2%에 불과하다. GDP의 62.7%가 서비스업, 24.8%가 제조업에서 나온다. 지난해 덴마크 GDP 중 상품·서비스 수출 비중은 70.1%로 한국(45.8%)보다 높다. 한국보다 더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인 것이다.
인구가 600만 명에 불과한 덴마크는 내수시장에 의존하지 않았다. 세계를 상대로 고부가가치 상품을 팔아 살아남았다. 이를 위해 산업 구조를 ‘세계 시장에서 1~3위를 유지하는 고부가가치 전문기업군’ 중심으로 재편했다. 당뇨·비만 치료제 전문 제약사 노보노디스크, 세계 1위 해운업체 머스크, 풍력터빈 강자 베스타드, 장난감 블록으로 유명한 레고 등이 대표적이다.
재도전 생태계가 잘 갖춰져 있다 보니 덴마크는 유럽의 대표적인 ‘창업왕국’으로도 꼽힌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의 ‘유럽 스타트업·스케일업 스코어보드’에 따르면 2025년 기준으로 덴마크 인구 100만 명당 스타트업은 723개로 EU 회원국 중 6위다. 스타트업이 급성장하는 단계에 들어서는 스케일업은 20개로 3위를 차지했다.
1주일에 세 곳씩 일자리에 지원한 뒤 채용 통보를 받으면 바로 다음날 출근해 주당 37시간 근무해야 한다. 이 모든 절차를 지키지 않으면 실업급여가 중단된다.
엠마 메르텐스 크리스텐센(27)은 지난해 1월 대학을 졸업한 뒤 두 번째 직장에서 방송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세상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닌 만큼 덴마크에 사는 것이 굉장히 큰 행운이라고 느낀다”고 말했다.
코펜하겐=정영효 기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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