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광엽 칼럼] 유럽, 복지국가라는 이름의 '가불 국가'

입력 2026-10-19 17:40   수정 2026-10-20 01:25

유럽은 많은 것의 기원이다. 민주주의 법치 인권에서부터 산업혁명 대학 축구까지 지구 문명, 문화의 태반이 유럽산이다. 빼놓을 수 없는 발명품에 복지국가도 있다. 유럽 복지국가는 함의가 남다르다. ‘다 같이 잘 먹고 잘사는 사회’를 향한 인류사적 실험의 일환이라는 다중적 지위를 지닌다.

세계 좌파 진영에서 특히 애지중지해 온 유럽 복지국가 모델이 무너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진앙지는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유럽 삼두마차다. 프랑스의 정체성이자 자부심인 ‘관대한 복지국가’ 체제는 작동 불능 양상이다. 은퇴 전 소득의 70%를 보장하는 연금 등 방대한 복지체계를 유지하느라 늘어나는 나랏빚이 하루 1조원에 육박한다.

재정적자가 1975년부터 시작돼 무려 52년째다. 이제 국채를 더 찍기도, 세금을 더 걷기도 어렵다. 국가부채(GDP의 118%)가 임계점을 넘고 조세부담률(44%)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국채 값도 추락해 이탈리아, 그리스는 물론이고 로레알 등 자국 회사채보다 싸졌다.

민심은 들끓는다. ‘교실에 앉을 의자도 없다’며 고등학생들이 돌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중앙은행 보유 국채를 불태워버리고 빚을 퉁치겠다’는 괴짜 정치인이 대선판 다크호스가 됐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채무불이행 선언 등 비상수법 거론도 공공연하다.

‘베버리지 보고서’의 원조 복지국가 영국의 추락도 빼놓을 수 없다. 30년 만기 국채 금리가 한때 연 6%를 넘어섰다. 한국보다 1.5%포인트 이상 이자를 더 줘야 국채가 팔린다는 의미다. 연금, 의료, 실업급여 등 복지비용 부족분을 메우느라 국채를 남발한 결과다.

위엄을 잃은 파운드는 투기자본 먹잇감이 됐다. 공격을 감당 못해 총리가 취임 49일 만에 사임하는 수모를 겪었을 정도다. 영국은 IMF 구제금융을 요청한 전력이 있다. 50년 전인 1976년의 일이다. 당시 ‘영국의 수치’로 불린 IMF행은 이제 툭하면 검토되는 상수다.

독일에서도 ‘복지국가 지속불가론’이 핵심 화두다. 메르츠 총리는 “현재 생산력으로는 오늘 누리는 복지국가의 재정을 충당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복지과잉이 역성장 경제와 맞물려 독일을 다시 ‘유럽의 병자’로 모는 형국이다.

유럽 리더들의 곤경에서 현대 복지국가의 민낯이 적나라하다. 단순화하면 유럽 복지모델은 ‘가불 모델’이다. 막대한 이자가 증거다. 영국은 올해 200조원을 국채 이자로 문다. 프랑스도 내년 이자비용이 140조원에 달한다. 세금은 비용을 동시대인 간, 국채는 세대 간 분담하는 구조다. 프랑스 학생시위대가 ‘미래를 도둑맞았다’는 피켓을 든 이유다.

복지모델의 실패는 복지배달 실패에 그치지 않는다. 성장 실패로 이어진다. 2000년 무렵 영국을 포함한 유로존 경제 규모는 미국과 대등했다. 지금은 70%대에 불과하다. 라이벌 미국은 세계 30대 기업 중 25개를 싹쓸이하고 있지만 유럽은 ASML(네덜란드)이 유일하다. 중국의 진격을 탓하지만 복지설계 오류로 인한 활력 상실이 근본 배경이다.

더 뼈아픈 건 잃어버린 존경이다. 미국은 유럽을 ‘무임승차자’라고 비난한다. 처음에는 코웃음 쳤지만 분위기가 달라졌다. 메르츠 총리는 BBC에 나와 ‘프리 라이더라는 미국 비판에 동의한다’고 토로했다. 잘못 설계한 복지시스템이 ‘세계인의 로망’ 유럽을 문명적 자살로 이끈 모양새다. “타인 희생에 기생하는 보편적 복지 국가는 공멸의 길”이라던 독일 경제학자 빌헬름 뢰프케(1899~1966)가 일갈한 대로다.

EU의 2류화는 재정건전성이 국민 삶을 결정하는 알파요 오메가임을 웅변한다. 국가 주도 퍼주기 복지의 허구도 경고한다. 그럼에도 한국에선 시장보다 큰 정부, 우후죽순 기본소득 등 유럽식 포퓰리즘의 변주가 위험 수위다. ‘긴축재정은 포퓰리즘’이라는 도발적 주장이 횡행한다. 선진국보다 부채비율이 낮아 한껏 빚을 내도 문제없다는 낯선 논리다. ‘당뇨·혈압쯤은 다들 달고 사니 달달한 것 맘껏 먹고 성인병 좀 얻는다고 별 대수냐’는 식의 무책임이다.

복지를 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잘하자는 얘기다. ‘모든 시민에게 국민적 최소한(national minimum) 보장’을 모토로 시작한 경직된 베버리지 식은 시효가 끝났다. 비효율·불공정 체제라는 증거가 넘친다. ‘86 정치’가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는 용기를 내길 기대한다.


관련뉴스

    top
    • 마이핀
    • 와우캐시
    • 고객센터
    • 페이스 북
    • 유튜브
    • 카카오페이지

    마이핀

    삼성바이오로직스현대차삼성전자트럼프

    와우캐시

    와우넷에서 실제 현금과
    동일하게 사용되는 사이버머니
    캐시충전
    서비스 상품
    월정액 서비스
    GOLD 한국경제 TV 실시간 방송
    GOLD PLUS 골드서비스 + VOD 주식강좌
    파트너 방송 파트너방송 + 녹화방송 + 회원전용게시판
    +SMS증권정보 + 골드플러스 서비스

    고객센터

    강연회·행사 더보기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이벤트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공지사항 더보기

    open
    핀(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