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TV- 인권분만> 8. 사랑의 호르몬과 출산

입력 2010-02-25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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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산시 우리 몸도 ‘모아 애착’ 위한 호르몬 분비



거위는 태어나서 가장 먼저 보게 되는 대상을 ‘엄마’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다행히 어미 거위를 처음 본다면 문제가 없지만, 어쩌다 종이로 만들어진 거위를 보거나 수컷 진돗개를 봐도 이를 어미로 알고 접촉을 시도한다고 한다. 이렇듯 동물행동학에서는 생후 첫 순간의 접촉이 모아 애착의 결정적인 시기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사람의 경우는 어떨까.

인권분만의 개념이 도입되기 전까지는 분만실에서 갓 태어난 아기를 아빠가 목욕시켜준 후 엄마 가슴에 올려주고, 늦어도 30분 안에 엄마 젖을 물게 해주는 일 등은 거의 없었다. 엄마는 엄마대로 의학적 처치를 받느라 바빴고, 아기도 별 이상이 발견되지 않으면 바로 신생아실로 옮겨져 엄마와 아기가 다시 만날 때까지 몇 시간이 걸리는 것은 예사였다. 하지만 요즘은 출산 후 첫 1시간이 신생아와 산모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아기와 엄마가 어떻게 첫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아기가 훗날 다른 사람이나 주변 환경, 세상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권분만에서는 출산 후 1시간 동안 엄마와 아기에게 의미있는 시간이 될 수 있는 출산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여러 연구들을 통해 진통과 출산 과정에서 엄마와 아기 사이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호르몬이 분비되어 ‘모아 애착’을 증진시켜주는 ‘자연의 힘’이 작용하는 것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출산 진통 과정은 산모와 태아, 모두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초산의 경우 보통 8시간에서 24시간 까지도 진통이 진행된다. 그 격렬한 고통을 끝까지 참아내는 산모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진통제를 투여받는 무통분만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진통이 진행되는 동안 산모의 몸에서는 이를 참아낼 수 있도록, 통증을 감소시키고 기쁨과 안위의 감각을 자극하는 엔드로핀이 분비된다. 태어나는 아기한테서도 엔드로핀이 분비되어 탄생의 고통을 완화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출산 직후 일정 기간 동안 엄마와 아기는 모두 엔드로핀에 흠뻑 취해 있게 되는데, 엔드로핀은 돌보는 행동을 불러 일으키고 상호 의존하는 관계를 유발하여 ‘모아 애착’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돕는다.

‘사랑의 호르몬’으로 알려진 옥시토신도 출산 바로 직후 최고치에 달하게 된다. 옥시토신은 남녀간 섹스를 할 때는 물론, 다른 사람과 식사를 하며 친밀감을 높일 때도 분비량이 늘어나는, 유대감을 높여주는 호르몬이다. 뇌하수체 후엽에서 분비되는 옥시토신은 아기를 낳을 때 자궁을 수축하고 태반이 배출되도록 자극할 뿐 아니라, 출산 직후에 최고로 분비됨으로써 모유 생성을 촉진시키기도 한다.

공격적인 성향을 나타낸다고 알려진 아드레날린 계 호르몬도 출산 전 막바지 수축 때 최고조에 달한다. 이는 야생에서 갓 새끼를 낳은 포유동물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는 자연적인 현상이다. 새끼를 낳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에서도 태어나자 마자 공격을 당할 수도 있는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미는 출산 직후에도 힘과 공격성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아드레날린의 작용으로 산모도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 민첩해지게 된다. 막판에 아기를 밀어내려고 자궁이 강하게 수축하는 동안 아기 역시 자체 생존 기전에 따라 아드레날린 계 호르몬을 분비한다.

노르아드레날린은 출산 단계에서 급속히 증가하여 태아가 생리학적 산소 결핍에 적응하도록 도와주는 호르몬이다. 아기가 태어날 때, 노르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면서 눈을 크게 뜨고 눈동자를 팽창시키면서 주위를 살피는데, 엄마는 갓난 아기의 이런 응시에 큰 기쁨과 감동을 느낀다.

이렇듯 출산 과정에서 작용하는 여러 호르몬의 행동학적 영향들은 사람에게도 생후 첫 1시간이 ‘모아 애착’을 위한 ‘민감한 시기’임을 시사한다. 출산 과정에서 진통제와 합성 호르몬 등을 인위적으로 사용하면, 자연 호르몬과 경쟁을 일으켜 호르몬의 균형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는 또한 출산 후 산모의 감정을 변화시켜 결국 모아 애착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출산 과정에서 약물 사용을 배제하고 자연분만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사람의 성장에 있어서 초기 애착의 결정적 시기보다 성장 기간 동안의 환경, 문화, 사회적 조건들이 훨씬 더 많은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초기 애착이 순조롭지 않다고 해서 훗날 행복하지 않다거나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몸에서 작용하는 호르몬조차도 진통, 출산 직후 ‘모아 애착’을 위해 왕성하게 분비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출산 환경도 이에 발맞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인권분만’의 개념도 우리의 분만 의료시스템이 최소한이라도 이 초기 애착의 시기를 배려해줘야 한다는 자각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도움말=인권분만연구회 회장 산부인과 전문의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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