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 what-정경호의 벼랑 끝 소통이야기] 9편. 소통리더십을 실천한 역사적 멘토 : 세종의 소통리더십-마음을 얻어라
왕위에 오른 세종은 신하들과 ‘토론’으로 소통을 시작한다. 현대에도 ‘토론’은 갑론을박, 길고도 어려운 과정이다. 하물며 당시로선 왕이 신하와 토론하는 것은 굉장히 제약이 많은 소통 방법이었다. 명령과 지시를 따르는 것에 익숙한 신하들로서도 낯선 환경이었겠지만, 토론과 소통은 국가가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세종은 사람의 마음을 얻고 소통을 하는 데 최고의 방법은 의견을 나누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리더의 가장 중요한 능력은 카리스마나 네트워크 능력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 여겼다. 그리하여 리더로서 선한 심성을 갖추고 말과 행동에 신뢰를 보이며 신하들의 충심을 얻었다. 임금은 하늘이 내린 것이고, 백성이 그 하늘이라는 소명 의식을 실천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뢰의 소통
세종이 생각하는 소통리더십은 바로 신뢰이며 이것이 마음을 얻는 지름길이라 여겼다. 개인적인 조직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공공의 영역에서 지위가 높을수록 그 지위의 절대적 기반은 사람들의 신뢰와 마음을 얻는 것이라 했다. 그래야 제대로 된 정당함과 사회적 권위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세종은 잘 알고 있었다.
세종은 진심으로 마음에 걸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자신은 물론 자신의 정치적 지지 세력을 위해 정책을 만들거나 국정 운영을 하는 일도 없었다. 자신이 먼저 깨끗해야 백성에게 믿음을 주고 나라의 정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세종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인본주의적 소통
세종은 백성과 생명을 우선했다. 사람을 해하고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정책 결정은 아무리 현실적이라 하더라도 무시하고 뒤로 미루었다. 국정의 운영에서 가진 자와 힘 있는 자의 편이 아니라 힘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었다. 세종이 명확하게 인식하기에 한 나라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권력하고는 거리가 먼 평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자신의 진정성을 유지하려 최선을 다해 노력했고, 어려움과 괴로움을 솔직하게 밝히고 이해를 구했다. 언제나 정직하지 않으면 하늘이 벌을 내린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백성은 곧 하늘이었기에 권력의 뒤편으로 숨지 않고 백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귀를 열고 들으려고 했다. 사람들의 입을 열어두게 하고 토론과 대화로서 민심의 수렴이 끊임없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그렇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것으로 여겼으며 이를 어길 시에는 근신에 들어가 오래도록 스스로 반성하며 회개했다.
수용과 개방의 소통
성리학을 근간으로 한 나라에서 세종은 불교와 승려들을 배척하기보단 그들이 전하는 귀한 말씀에 대해서 귀를 기울였다. 물론 나라의 근간을 파괴한다는 비판과 공격을 받기도 하였지만, 이념적으로 어느 한 쪽에 기울기보다는 수용과 다양함으로 모두를 존중하며 진심으로 소통하고자 했다.
또한 벼슬과 인사에 있어서도 편 가르기나 자기와 가까운 사람만을 편애하지 않았다. 능력 있는 사람을 우선했으며 무엇보다 각 인재의 사람됨과 심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사람 됨됨이가 안 되어 있는 인재들은 철저히 배제했다. 검증을 거쳐 수용한 인재나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에 대해서는 한번 신뢰하면 끝까지 믿고 지지하는 소통리더십을 발휘하였다.
대리와 위임의 소통
성공적인 리더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 훌륭한 참모와 2인자들의 뒷받침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신뢰할 수 있는 인재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일정한 결과물을 내도록 재량권을 폭넓게 인정하며 현재의 단기적 성과에 연연해 하지 않는 리더. 세종 대왕은 위임 소통으로 수많은 2인자를 발굴하고 기르며 여러 분야에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또 세종 대왕은 신하들과 끊임없는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최적이 아니라 최선의 대안들을 찾는 역할을 계속했다. 모든 것을 위임만 한 채 방관하지 않고 스스로 공부하고 연구하였다. 왜냐하면 위임하는 자는 문제의 맥락을 완전히 꿰뚫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들음에서 믿음이 생기고, 믿음에서 행동이 따른다”
세종 대왕이 대리와 위임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소통과 협력을 지향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경호 엔학고레 소통아카데미 대표>
왕위에 오른 세종은 신하들과 ‘토론’으로 소통을 시작한다. 현대에도 ‘토론’은 갑론을박, 길고도 어려운 과정이다. 하물며 당시로선 왕이 신하와 토론하는 것은 굉장히 제약이 많은 소통 방법이었다. 명령과 지시를 따르는 것에 익숙한 신하들로서도 낯선 환경이었겠지만, 토론과 소통은 국가가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세종은 사람의 마음을 얻고 소통을 하는 데 최고의 방법은 의견을 나누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리더의 가장 중요한 능력은 카리스마나 네트워크 능력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 여겼다. 그리하여 리더로서 선한 심성을 갖추고 말과 행동에 신뢰를 보이며 신하들의 충심을 얻었다. 임금은 하늘이 내린 것이고, 백성이 그 하늘이라는 소명 의식을 실천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뢰의 소통
세종이 생각하는 소통리더십은 바로 신뢰이며 이것이 마음을 얻는 지름길이라 여겼다. 개인적인 조직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공공의 영역에서 지위가 높을수록 그 지위의 절대적 기반은 사람들의 신뢰와 마음을 얻는 것이라 했다. 그래야 제대로 된 정당함과 사회적 권위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세종은 잘 알고 있었다.
세종은 진심으로 마음에 걸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자신은 물론 자신의 정치적 지지 세력을 위해 정책을 만들거나 국정 운영을 하는 일도 없었다. 자신이 먼저 깨끗해야 백성에게 믿음을 주고 나라의 정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세종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인본주의적 소통
세종은 백성과 생명을 우선했다. 사람을 해하고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정책 결정은 아무리 현실적이라 하더라도 무시하고 뒤로 미루었다. 국정의 운영에서 가진 자와 힘 있는 자의 편이 아니라 힘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었다. 세종이 명확하게 인식하기에 한 나라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권력하고는 거리가 먼 평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자신의 진정성을 유지하려 최선을 다해 노력했고, 어려움과 괴로움을 솔직하게 밝히고 이해를 구했다. 언제나 정직하지 않으면 하늘이 벌을 내린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백성은 곧 하늘이었기에 권력의 뒤편으로 숨지 않고 백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귀를 열고 들으려고 했다. 사람들의 입을 열어두게 하고 토론과 대화로서 민심의 수렴이 끊임없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그렇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것으로 여겼으며 이를 어길 시에는 근신에 들어가 오래도록 스스로 반성하며 회개했다.
수용과 개방의 소통
성리학을 근간으로 한 나라에서 세종은 불교와 승려들을 배척하기보단 그들이 전하는 귀한 말씀에 대해서 귀를 기울였다. 물론 나라의 근간을 파괴한다는 비판과 공격을 받기도 하였지만, 이념적으로 어느 한 쪽에 기울기보다는 수용과 다양함으로 모두를 존중하며 진심으로 소통하고자 했다.
또한 벼슬과 인사에 있어서도 편 가르기나 자기와 가까운 사람만을 편애하지 않았다. 능력 있는 사람을 우선했으며 무엇보다 각 인재의 사람됨과 심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사람 됨됨이가 안 되어 있는 인재들은 철저히 배제했다. 검증을 거쳐 수용한 인재나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에 대해서는 한번 신뢰하면 끝까지 믿고 지지하는 소통리더십을 발휘하였다.
대리와 위임의 소통
성공적인 리더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 훌륭한 참모와 2인자들의 뒷받침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신뢰할 수 있는 인재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일정한 결과물을 내도록 재량권을 폭넓게 인정하며 현재의 단기적 성과에 연연해 하지 않는 리더. 세종 대왕은 위임 소통으로 수많은 2인자를 발굴하고 기르며 여러 분야에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또 세종 대왕은 신하들과 끊임없는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최적이 아니라 최선의 대안들을 찾는 역할을 계속했다. 모든 것을 위임만 한 채 방관하지 않고 스스로 공부하고 연구하였다. 왜냐하면 위임하는 자는 문제의 맥락을 완전히 꿰뚫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들음에서 믿음이 생기고, 믿음에서 행동이 따른다”
세종 대왕이 대리와 위임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소통과 협력을 지향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경호 엔학고레 소통아카데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