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근 칼럼] 이순신 기다리다 ‘삼시세끼’에 만족… 2014년은 처량했다

입력 2014-12-31 04:29   수정 2015-01-02 16:02

▲ 드라마 ‘미생’과 예능프로그램 ‘삼시세끼’, 그리고 독립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사진 = tvN, CGV 아트하우스, 대명문화공장)


2014년은 천만 영화 ‘변호인’ 열풍과 함께 시작됐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바로 국민이다’는 학생들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대사에 한국인은 눈물을 흘렸다. 현재의 사회지도층이 국민을 지켜주지 못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대중문화 속에서나마 서민을 수호하는 지도자를 대리만족했던 것이다.

영화 ‘역린’은 정조를 지도자로 내세워 일정 정도 성공을 거뒀다. 정조에게만 집중했다면 더 큰 성공을 거둘 수도 있었겠지만, 너무 많은 인물들에게 집중하느라 작품의 응집력이 흐트러졌다. 드라마에선 ‘기황후’가 한민족의 영웅을 제시하겠다며 방영됐지만, 역적을 영웅으로 미화하는 게 말이 되느냐란 역풍에 휘말렸다.

‘정도전’이 서민을 수호하는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줘 정통사극 열풍이 나타났다. 정도전은 서민을 방치하고 자기들 이익만 구하는 사회지도층에 반기를 든 고려말의 88만원 세대였다.

중반기에 지도자의 끝판왕 이순신 장군이 등장했다. ‘장수의 충은 백성을 향한다’는 대사에 관객은 눈물을 흘렸다. 1700만 관객이라는 집단병리적 관람 열풍이 나타났다. 한국인이 얼마나 애타게 믿을 수 있는 지도자를 갈구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현실에선 세월호 사건이 사회지도층에 대한 신뢰, 공적 신뢰를 완전히 붕괴시켰다. 눈앞에서 배가 침몰해가는데 그 안의 학생을 단 한 명도 구해내지 못한 시스템, 유병언이라는 괴이한 인물을 재벌급으로 키워준 지도층에 대한 불신이 하늘을 찔렀다.

‘으리’ 열풍이 나타났다. 공적 신뢰가 붕괴하자 믿을 건 사적 신뢰밖에 안 남은 것이다. 무한경쟁 각자도생의 살풍경에 돈의 가치가 극대화됐다. 만수르 열풍이 나타났다. 아랍부자가 단지 돈이 많다고 영웅시된 현상이다. 한국 네티즌이 만수르 SNS로 몰려가 구걸을 하면서 나라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 ‘땅콩 회항’ 조현아 전 부사장과 사무장(사진 = SBS)


내부의 신뢰가 무너지자 외국인이 주목 받았다. 프란치스코 교황 열풍이다. 한국인은 교황의 따뜻함에 위로 받았다. ‘비정상회담’에서 외국인들이 들려주는 외국이야기에도 폭발적인 관심이 나타났다. 아이스버킷 신드롬을 통해 빌게이츠 등 외국 지도층의 사회적 책임의식도 주목 받았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아이스버킷 운동이 한국에선 유명인 인증 유희로 변질됐다는 자탄이 나오기도 했다. 한국 지도층이 얼음물을 뒤집어쓰자 찬사보다는 ‘이런 인증샷 홍보할 시간에 자기 할 일이나 잘하라’는 핀잔이 쏟아졌다.

‘땅콩 회항’ 사태에서 조현아 전 부사장이 ‘너 내려!’ 한 마디로 한국 지도층의 맨얼굴을 보여줬다. ‘밀회’는 재벌과 사학재단 이사 등 갑들의 세계를 디테일하게 그려 찬사 받았다. ‘미생’은 ‘그들의 세계’로부터 소외된 을의 처지를 세밀하게 그려 찬사 받았다.

연말에 국민이 뼈저리게 깨달은 것은, 결국 이순신, 정도전, 변호인은 현실에 오지 않았고 우리 모두는 미생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항공기 사무장이라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직업의 주인공마저 갑 앞에선 천민이나 마찬가지였다. 현실이 달라질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마음이나 달래야 한다. 아무 것도 안 하는 예능 ‘삼시세끼’가 떴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도 예상치 못한 성공을 거뒀다. 그런 따뜻한 작품들을 통해서 한국인이 위안을 받은 것이다. 결국, 이순신 기다리다 ‘삼세세끼’에 위로 받은 2014년이었다.

하재근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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