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연극 ‘이영녀’의 기대와 실제

입력 2015-05-26 11:36  



자연주의 연극은 너무 적나라하다. 너무 사실적이어서 보기 불편할 정도이다. 그러나 불편하다고 피할 수 없다. 봐야만 한다. 그래야만 세상이 바뀐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주의 연극은 많이 공연되어야 한다.

자연스러운 것이 사실적인 것

사실적이라는 것은 가장 왜곡이 없는 표현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주의 연극이라 함은 현실과 가장 비슷하게 표현된 작품을 말한다. 그렇다면 현실과 가장 비슷하게 표현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현실과 가장 비슷하려면 먼저 ‘자연스러워’야 한다. 현실의 모습을 여과 없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내어놓는 것이 바로 사실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주의 연극은 현실에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어두운 면을 좀 더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아무리 어두운 현실이라도 날 것 그대로 표현한 예술사조인 자연주의는 사실주의와 깊은 연관을 맺는다. 1925년에 발표된 김우진 작, 연극 ‘이영녀’ 역시 당대의 힘든 현실을 가공 없이 드러내 사실성을 부각한 표현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한국 대표 자연주의 연극이다.

자연주의 공식에 잘 맞는 희곡 ‘이영녀’, 그렇다면 연극 ‘이영녀’의 공식은?

희곡 ‘이영녀’는 자연주의 작품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자연주의의 여러 공식에 따라 사실적인 표현을 구사하도록 쓰였다. 일상어를 풍부하게 활용한 대사들을 주축으로 무대와 객석의 완벽한 분리를 이행해낸 방식이 바로 그 대표 공식이다. 이번 국립극단에서 공연한 연극 ‘이영녀’ 역시 이 공식을 기본적으로 따르고 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희곡에서 유도했던 사실주의적인 표현 방식에서 머물지 않고 여러 다양한 연출적 시도를 통해 작품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것이 특징이다.



공식1: 단조로움을 걷어내기 위한 방법, 색채의 강조

가장 먼저 언급할 부분은 작품 전반의 색채이다. 작품은 분명 1920년대의 암울한 현실에 대해 인물들의 입으로 상당히 많은 양의 말을 내뱉도록 장치하는 사실적인 방식을 택한다. 반면 무대는 상대적으로 모호하게 표현한다. 연기 공간은 낡은 가구들과 넝마가 가득한 무대와 조도를 매우 낮게 디자인한 조명이 조화되어 이뤄낸다. 하지만 무대는 목포 유달산 부근 빈민촌의 분위기를 자아낼 뿐이지, 소름 끼칠 만큼 당대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지는 않는다. 1920년대의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주요 감각으로 내세운 추상적인 디자인인 것이다. 이러한 무대와 조명 디자인은 사실적 표현이 극적 전개의 주를 이룬 이 작품이 범할 수 있는 단조로움의 우를 걷어내는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공식2: 사실적인 인물들이 보여준 정지 화면 연기법이 가져다 준 결과

근대사의 어두운 시절에 대해 적나라하게 다룬 연극 ‘이영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예상대로 범상치 않다. 온전함이란 없던 시대에 현실을 버텨내기 위해 버둥거려야 했던 인물들은 각자 결핍을 내포한 모습으로 등장해 이 연극을 가득 메운다. 부족한 재화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전쟁 같은 삶의 시간들에서 인물들은 ‘기형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기형적인 모습은 현실에 팽배한 인간 군상이다. 그런데 당대 현실에서 갓 튀어나온 듯한 인간들이 보여주는 행동 양식은 현실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내레이터가 인물이 등장할 때 마다 소개를 하고 등장한 인물들은 자신이 소개되는 동안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임을 구사했다가 소개가 끝나면 일상의 움직임으로 회귀하는 연출방식을 활용해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주의적 연기양식과는 거리가 멀며, 현실성 짙은 인물군상과 모순된다. 마치 ‘얼음땡 놀이’를 하는 것 같은 이 연출 방식은 인물들에 대한 관심의 흐름을 깨버려 당시의 현실 안에 인물을 자연스럽게 배열하여 극적 몰입을 하는 감정 이입의 과정을 방해한다.

이러한 행동 표현은 이 작품 전반에 빈번하게 등장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결핍을 안고 존재하기 때문에 자칫 이러한 움직임 연기가 그들의 ‘기형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위한 지점으로 오인될 가능성이 높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슬랩스틱으로 전달될 소지가 있다. 특히나 배우들 간 호흡이 잘 맞아 들어가지 않았던 지점들의 경우 코믹적 표현으로 이해될 소지가 더 많다. 따라서 이러한 표현이 지속적으로 나오는 것은 작품의 흐름을 따라가고자 집중했던 관객의 이입도를 떨어드리는 역반응을 가져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은 자연주의의 사실적인 구현이 가져올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연출의 히든카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작품에 대한, 시대에 대한 선행 이해가 없는 관객의 경우, 이러한 연출을 맥락적으로 이해하기보다 그냥 코미디로만 받아들일 수 있다. 관객은 시대에 대한 공부를 하고 오지 않는다, 예술에서 보여주는 게 그 시대라고 믿는다. 따라서 더 친절하게 구현해줄수록 좋다.



‘이영녀’라는 작품에게 품는 기대, 그리고 시의성

이 작품은 90년 만에 초연되는 김우진의 작품이라는 점과 그러한 작품을 국립극단이 공연한다는 점만 미루어 보아도 화제몰이가 되는 기대작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격변기였던 1920년대의 사회적 문제점인 빈곤 문제, 전통 구조의 강조가 야기하는 사회 모순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적나라한 색채로 한다는 점에서 더욱 기대를 모은다. 특히 작품에서 이영녀라는 여성을 내세워 사회의 모순을 부각하는 점은 남성우월주의적 관습이 만연한 우리 사회에 극복해야할 과제인 여성의 인권문제에 대한 경종의 시선을 읽어내기에 충분해 현대 관객에게 시의성까지 부여할 수 있는 지점이다.

이러한 지점은 이영녀의 하나뿐인 아들 ‘관구’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이영녀가 몸을 팔아가며 삶의 고난과 싸우는 이유는 아들 관구를 학교에 보내 공부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관구는 실제로 집안을 일으킬만한 희망적인 인물이 아니다. 매일 누나와 싸우거나 친구와 싸우고 돌아와 눈물바람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 나약한 아이다. 그래서 인지 관구는 남자아이인데도 여자배우가 연기한다. 남성들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면서까지 돈을 버는 것이 또 다른 남성인 ‘관구’를 위한 것이라는 ‘이영녀 인생의 고리’는 아직도 팽배하는 남성 위주 사회구조에 살아가는 여성 앞에 놓인 커다란 장벽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집안의 희망으로 상징되는 ‘관구’를 희망적으로 그리지 않으면서 희망으로 상징했다는 점은 여성들에게 장벽으로 존재하는 사회의 많은 알레고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여자에게 슈퍼 파워를 강요는 사회, “요즘 여자치고 갈보 아닌 여자가 있나요?”

현대 사회가 모계 사회로 전환되고 있다는 견해가 있다. 그런데 그러한 시대의 흐름이 만연할수록 여성들에게 지워진 삶의 굴레는 가중된다. 아직 우리 사회는 남성 위주 사회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여성은 가사의 의무를 하면서 경제 활동을 해야 하고, 자신의 인권 신장을 위해 투쟁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오버랩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객사한 남편 대신 아이들을 돌보면서 돈벌이도 해야 하고, 거친 세상과 맞서야 하는 복합적 고난에 휘말린 이영녀의 삶을 들여다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지점이다. 게다가 여성들에게 집중되는 이러한 고생은 남성들의 무력함을 가시화시키는 장치가 되므로 모계사회로의 전환되는 현시점의 흐름과 맞닿은 지점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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