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롭지만 결코 모나지 않은 그의 얼굴 속에는 절제와 일탈이 공존했다. 모순적인 매력을 가진 사람, 배우 이제훈의 첫 인상이었다.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제훈은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로 속내를 털어놓는가 하면 유쾌한 장난기로 분위기를 주도했다.
4일 개봉한 영화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이하 ‘탐정 홍길동’)은 이제훈의 군 제대 후 첫 스크린 복귀작이다. 영화는 사건 해결률 99%를 자랑하는 탐정 홍길동(이제훈)이 20년 전 원수 김병덕(박근형)에 복수를 하기 위해 나섰다가 거대 조직 광은회의 실체와 마주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시사회 이후 반응은 뜨거웠다. 화려한 할리우드 히어로물에 견주어 절대 뒤지지 않는 퀄리티를 뽐낸 한국형 히어로의 탄생에 호평이 쏟아졌다. 이제훈은 “시사회 끝나고 기자간담회 때 유난히 떨리더라고요. 어떻게 보셨을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호의적인 평이 많아서 ‘내 선택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죠”란 소감으로 말문을 열었다.
군 복무 당시 쏟아진 영화계의 숱한 러브콜 중, 이제훈이 택한 작품은 다름 아닌 `탐정 홍길동`이었다. “예전에 영화 ‘남매의 집’, ‘짐승의 끝’을 보고 조성희 감독님의 독창적인 세계관에 깜짝 놀란 적이 있어요. ‘탐정 홍길동’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남매의 집’ 상업오락영화 확장판으로 느껴졌죠. 그래서 너무 반가웠고 감독님의 독특한 상상을 구현하는데 동참할 수 있어서 그저 감사했어요”
‘탐정 홍길동’은 비현실적인 배경과 인물, 만화적인 구성이 특징인 작품. 판타지 요소로 가득한 캐릭터는 이제훈 특유의 사실적인 연기로 생동감을 얻었다. “사실 전 리얼리즘에 입각한 작품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근데 그런 작품만 고집하면 재미없는 배우로 느껴질 것 같았고, ‘만화적인 스토리에 내 연기를 입히면 어떤 색일까’ 호기심이 생겼죠”
극중 이제훈이 맡은 홍길동은 정의가 아닌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잔인한 계획을 꾸미는 인물이다. “길동이는 시종일관 까칠하고 정의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죠. ‘이런 비호감 캐릭터가 관객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까’가 관건이었어요. 또 대사도 고민을 많이 했죠. ‘홍길동님에게 덤빈 벌이다’ 같은 대사들이 일상적인 대화체가 아니라, 자칫하면 오글거릴 것 같더라고요. 유치한 느낌 없이 톤 앤 매너를 유지하려고 굉장히 노력했어요”
‘탐정 홍길동’은 이제훈을 중심으로 그와 환상적인 호흡을 선보인 아역배우들의 야무진 연기 역시 큰 화제였다. 극중 홍길동의 조수이자 친구로 톡톡 튀는 매력을 드러낸 이들은 묵직한 극의 흐름을 환기시키고 깨알 같은 웃음을 선사했다. 이제훈은 평소 아이들을 좋아하는 탓에 까칠하게 대하는 연기가 힘들었다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꺼내놓기도 했다. “전 영화 속 말순이처럼 귀엽진 않았던 것 같아요. 제가 어릴 때 너무 말썽꾸러기여서 친척들이 ‘네가 집에 놀러오는게 싫었다’고 하신 적도 있어요(웃음)”
뒤이어 이제훈이 털어놓은 그의 어린 시절은 조금 특별했다. “그땐 이상하리만큼 영화를 많이 봤어요. 또래 친구들이 만화를 볼 때 저는 혼자 한국영화에 관심이 많았고 매일 비디오가게 가서 테이프를 보는 게 행복이었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언젠가 나도 저렇게 영화에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꿈꾸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이제훈이 본격적으로 걷게 된 배우의 길은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뒤 현실이 됐다. “어른이 돼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뭘까’ 고민하다가 무작정 연기학원에 등록했어요. 처음엔 ‘딱 1년 정도 해보고 비전이 안 보이면 바로 군대 갔다 와서 취업해야지‘ 했는데 막상 시작해보니 그렇게 단기간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거죠. 그때부터 실패하면 돌아갈 길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연기에 인생을 걸기로 했어요. 그래서 다니던 공대를 자퇴하고 한예종 연극원에 진학했죠. 그때부터 인생이 확 달라졌네요(웃음)”
그가 배우로서 첫 발을 내딛은 건 독립영화였다. 하지만 처음 영화를 촬영한 후 좌절했다고 한다. “모니터를 하는데 제가 상상하던 제 모습이 아닌거예요. 왠지 어리숙하고 배우로서 아우라도 없고 입술도 너무 두꺼운 것 같고 그냥 모든 게 마음에 안 들더라고요. 근데 얼마 못가서 생각을 바꿨죠. 연기를 하는 사람의 가치를 더 우선시하자고요. 그러고 나서 진짜 고민해야 될 지점들이 더 선명해졌어요”
이젠 `독립영화 출신`이란 수식어가 낡은 느낌이 들만큼 성장했지만 여전히 그는 독립영화가 낳은 보물로 꼽힌다. 그리고 지금도 ‘제 2의 이제훈’을 꿈꾸는 수많은 신인들이 독립영화계에 얼굴을 비추고 있다. 그에게 독립영화란 어떤 의미일까. “한마디로 배우로서의 근간이죠. 단편영화들은 제게 단순히 필모그래피를 만드는 것 외에 대중에 제 이름을 각인시킬 수 있도록 해준 습작 같은 존재고요. 제가 그랬듯, 배우를 꿈꾸는 분들에게 독립영화는 성장의 기회가 될 거라 믿어요”
올해로 데뷔 10년 차. 인터뷰 내내 유쾌하던 이제훈은 지금도 연기가 어렵고 이 때문에 매순간 불안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처음엔 눈빛만으로 영화의 공기를 들었다 놨다하는 배우가 금방 될 수 있을거라 생각했어요. 근데 정말 어려운 일이죠. 특히 ‘연기를 잘 할 수 있을까’, ‘전작을 답습하고 있진 않나’ 이 두 가지는 경력이 쌓일수록 더 깊게 고민되는 부분이에요. 저는 언제쯤 이 모든 고민에서 편해질 수 있을까요(웃음)”
‘건축학개론’, ‘시그널’에 이어 ‘탐정 홍길동’까지 그는 트렌디한 현대극보다는 지나간 시절의 감성을 담은 작품들에 주로 등장했다. 우연의 일치일거란 예상을 깨고 의외의 이야기가 돌아왔다. “사실 전 아날로그 감성을 추억하는 걸 좋아해요. 인스타그램 보다는 직접 만나는 게 좋고, 음악도 스트리밍 서비스 보단 카세트테이프가 좋죠. 그래서 작품을 고를 때도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한 정서에 더 손이 가는 경향이 있어요. 아무래도 나이가 들었나 봐요(웃음)”
인상 깊었던 건 높아진 인기와 많아진 팬들을 언급하자 이제훈의 입가에 핀 초연한 미소였다. “영원히 사랑받을 수 없다는 걸 알아요. 세상은 늘 새로운 스타를 원하니까 혜성처럼 등장한 누구라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관심에서 멀어지겠죠. 그래서 매 작품이 소중한 거고 심지어 저는 늦은 나이에 시작했기 때문에 연기 하는 매 순간이 절실해요. 최소한 나태해지거나 흔들려서 잊혀지는 일이 없도록 열과 성의를 다할 거예요. 배우로 사는 건, 아직도 꿈처럼 느껴져요. 깨고 싶지 않은 꿈같은 거죠”(사진=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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